게임, 한 화면짜리 세계가 통시적으로 엮은 세대간의 감정

게임, 한 화면짜리 세계가 통시적으로 엮은 세대간의 감정

윈도우 98 시절, 컴퓨터 수리를 맡기고 나면 기본으로 깔아주던 게임들이 있었다. 부탁한 적도 없는데 바탕화면에 아이콘이 서너 개 늘어나 있었지. 지뢰찾기나 카드놀이 같은 기본 게임 말고도, 수리 기사님의 취향이 반영된 듯한 게임들이 조용히 설치되어 있었다. 그게 일종의 서비스였고, 어쩌면 그 시절의 무언의 문화였던 것 같다. 컴퓨터가 고쳐져서 돌아온 날은 그래서 늘 조금 설렜다. 이번엔 뭐가 깔려 있을까 하고.

그 전에는 동생이랑 팩 끼워서 하는 게임을 하곤 했지. 패미컴인 건 알겠는데, 팩은 게임이 여러 개 들어있는 해적판이었던 것 같다. 42 in 1, 100 in 1 같은 숫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던 노란 카트리지. 목록을 넘겨보면 이름만 다르고 실은 같은 게임이 절반쯤 섞여 있었지만, 그걸 알면서도 하나하나 다 켜봤다. 팩을 후 불어서 끼우고, 안 되면 다시 빼서 불고. 지금 생각하면 아무 과학적 근거도 없는 의식이었는데, 그 의식까지 포함해서 게임이었던 듯.

지금 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사실 재미있을 거라는 확신보다는 그 감각을 다시 만져보고 싶다는 쪽에 가깝다. 요즘 오픈월드 게임에서는 말도 안 되게 넓은 지역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저때의 스크린 한 장 분량의 공간이 주는 감흥을 다시 느끼기는 어려운 듯. 한 화면이 세계의 전부였고, 화면 끝에 닿으면 다음 화면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모험이었다. 지도가 없으니 머릿속에 지도를 그렸고, 공략집이 없으니 동생이랑 서로가 공략집이었다. 공간이 좁아서 상상이 넓었던 거다. 지금의 오픈월드는 공간이 넓은 대신 상상할 여백을 개발사가 미리 다 채워놓은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요즘 게임이 감흥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감흥의 종류가 다를 뿐이겠지. 태어나자마자 마인크래프트가 있는 친구들에게는 그 나름의 감흥들이 있을 거다. 처음부터 무한한 세계가 주어진 세대에게 '한 화면의 설렘'을 설명하는 건, 스마트폰 네이티브에게 전화 다이얼 돌리는 손맛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할 테니까. 그들에게는 블록을 처음 캐던 순간, 친구 서버에 처음 접속하던 순간이 내 패미컴의 노란 팩 같은 자리에 있겠지. 그 느낌은 어떨까. 궁금한데, 아무리 물어봐도 결국 번역본으로만 전달받을 수 있는 종류의 감각일 거다.

그 다음 세대는 VR 게임이 첫 기억인 세대가 나올 테고, 추억에 따라 세대차이가 나겠지. 흥미로운 건 이 차이가 단순히 '누가 더 좋은 걸 경험했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각자의 첫 경험이 각자의 기준점이 되고, 그 기준점에서 세계를 재는 거니까. 나에게 오픈월드가 '넓어진 것'이라면, 마인크래프트 세대에게는 그게 그냥 기본값이다. 넓어진 게 아니라 원래 넓었던 것. 감동은 변화량에서 오는 거라, 기준점이 다르면 같은 걸 봐도 감동의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복고라는 게 재미있어진다. 신세대는 자기가 겪지 않은 옛것에 호기심을 갖고, 구세대는 트렌드를 따라잡으려 애쓴다. 요즘 애들이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LP를 사는 걸 보면, 복고는 '겪은 사람의 추억'과 '안 겪은 사람의 신선함'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화하는 것 같다. 나에게 도트 그래픽은 추억이지만 마인크래프트 세대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미감일 수 있는 거지. 같은 물건이 한쪽에서는 회귀고 한쪽에서는 발견이다.

다만 복고에도 유통기한 비슷한 게 있는 듯하다. 너무 가까운 과거는 그냥 촌스러운 거고, 적당히 멀어야 멋이 된다. 5년 전 유행은 민망하지만 25년 전 유행은 힙하다. 복고는 어느 정도의 옛것이어야 흥미를 줄 것이며, 그 '어느 정도'가 대략 한 세대, 그러니까 20~30년 주기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 Y2K가 돌아온 것도 그 주기에 얹혀 있는 거겠지.

반대 방향의 질문도 있다. 구세대는 과연 발전한 것들로부터 센세이션을 얻으면서 트렌드를 탈 수 있을까. 솔직히 쉽지 않을 거라고 본다. 새로운 걸 접해도 자꾸 기준점이 과거에 있어서, 감탄보다 비교가 먼저 나온다. "요즘 게임 좋긴 한데 옛날 그 맛이 없어"라는 말은 사실 게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기 기준점에 대한 고백에 가깝다. 트렌드를 타려면 비교를 잠시 꺼두고 지금 세대의 기준점으로 건너가 봐야 하는데, 그게 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 피곤한 거다. 피곤함을 감수할 만큼의 호기심이 남아 있느냐가 관건이겠지.

유행의 공식이 있다면, 그중에는 추억과 이전 세대에 대한 호기심이 상수로 들어가 있지 않을까. 변수는 매번 바뀐다. 패미컴이었다가, 싸이월드였다가, Y2K였다가. 하지만 '내가 겪은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내가 못 겪은 것을 궁금해하는 마음', 이 두 개는 세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마인크래프트를 하는 친구들도 언젠가 "그때 그 각진 블록의 맛"을 그리워할 테고, 그 밑의 세대는 그걸 신기해하며 다시 꺼내 들겠지.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노란 해적판 팩의 목록 화면이 떠오른다. 절반은 중복이었던 그 목록. 넓은 세계는 아니었지만, 한 화면씩 넘어가던 그 세계가 내 기준점인 건 어쩔 수 없다. 기준점은 못 바꾸더라도, 다른 기준점이 있다는 걸 아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세대차이를 못 없애더라도, 최소한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어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