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뭣 고

이 뭣 고

니는 와 여기있노.

지금 있는 위치를 물어보는 게 아니다.
주소를 묻는 것도 아니고, 네이버 지도 켜서 “현재 위치를 확인 중입니다” 하는 그런 얘기도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마음의 자리.
내가 지금 어디에 붙어 있는지.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지.
내 영혼이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지.
그걸 묻는 말이다.

질문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올라오는 직관.
머리로 꾸며내기 전에, 사회적 정답으로 포장하기 전에,
“아 이 질문은 지금 나한테 이렇게 들리는구나” 하고 느껴지는 그 첫 울림.
그게 어쩌면 진짜 내가 위치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꾸 자기가 있는 자리를 착각한다.
직장에 있으면 직장인이 자기 자리인 줄 알고,
연애를 하면 애인의 평가 안에 내가 있는 줄 알고,
돈이 없으면 부족함 속에 내가 갇힌 줄 알고,
칭찬을 받으면 그제야 내가 살아있는 줄 안다.

근데 그건 다 임시 좌표다.
와이파이 잡히는 위치 같은 거다.
신호 세면 좀 당당해지고, 신호 약하면 갑자기 인생이 망한 것 같고.
인간이라는 기계가 너무 외부 신호에 예민하게 설계되어 있다.
이러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내면 GPS가 오류난다.
“목적지를 재탐색합니다.”
근데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재탐색만 존나 함.

세상의 기준에 붙들려 있을수록 마음의 소리는 멀어진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 정상, 안정, 생산성, 효율, 연봉, 스펙, 태도, 이미지.
그런 것들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이 너무 커지면 내 안에서 올라오는 작은 목소리는 묻힌다.
마치 식당에서 옆 테이블 아저씨가 너무 크게 통화하면
내 앞사람 말이 하나도 안 들리는 것처럼.
세상 기준은 늘 스피커가 크다.
내 마음은 보통 속삭인다.
그래서 조용히 앉아 있어야 들린다.

그런데 또 문제는, 마음의 소리를 듣겠다고 너무 귀를 열어버리면
일상생활의 모든 대화가 갑자기 선문답처럼 들린다는 거다.

“밥 먹었어?”
— 나는 정말 배고픈가, 아니면 허기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가.

“출근했어?”
— 나는 어디에 출근했는가. 회사인가, 운명인가, 반복되는 카르마의 사무실인가.

“뭐해?”
— 나는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라는 것은 행위 이전에 존재하는가.

이러고 있으면 사회생활이 안 된다.
상대는 그냥 김밥 먹었냐고 물어본 건데,
나는 갑자기 무문관 37칙을 열고 있음.

("뜰 앞의 잣나무(정전백수·庭前栢樹)"라는 화두로, 조주 종심(趙州從諗) 선사가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라는 스님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진리는 특별한 곳이 아닌, 일상적이고 평범한 현재의 순간에 있음을 가리킵니다. )


현대인의 비극이다.
카톡 하나에도 존재론이 끼어든다.
읽씹당하면 불교의 공 사상이 아니라 그냥 상처받은 사람 되는 건데
괜히 '관계란 본래 무상한 것…' 하면서 정신승리하다가 더 아파짐.

선문답을 좋아하면 위험한 점이 있다.
모든 문장이 문이 된다.
근데 인간은 모든 문을 열고 살 수 없다.
문이 있으면 그냥 지나가야 할 때도 있고,
닫아둬야 할 때도 있고,
가끔은 문인 줄 알았는데 그냥 벽지 무늬일 때도 있다.
근데 의미 과부하가 오면 벽지 무늬에도 계시가 보인다.
이때부터 일시적 정신착란 상태가 된다.
세상이 너무 많은 말을 걸어온다.
간판도 말하고, 버스 번호도 말하고,
친구의 표정도 말하고.

“너 뭐하고 있니.”

예전에 새해 파티를 열었을 때 친구가 내 명찰에 적어준 문장이다.

그때는 그냥 장난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명찰에 이름 대신 그런 말을 적어준다는 게 웃기기도 하고,
뭔가 나를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날의 공기 안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말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아직도 그 명찰을 보관하고 있다.
버리지 못했다.
사람은 어떤 물건을 버리지 못할 때,
사실 물건을 보관하는 게 아니라 그때의 질문을 보관하는 것 같다.
그 명찰은 종이가 아니라 작은 화두가 됐다.
“너 뭐하고 있니.”
“너 지금 뭐하니.”
처음엔 별말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뭐하고 있나.

살고 있나.
도망치고 있나.
회복하고 있나.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나.
사랑받고 싶어서 몸부림치고 있나.
아니면 진짜 내 길을 찾고 있나.

이 길 저 길 가보면서 길을 찾는 중이랄까.
근데 또 생각해보면 길을 찾는다는 말도 웃기다.
길은 원래 밖에 있는 건지,
내가 걸어가면 생기는 건지 모르겠다.
남들이 만들어둔 길을 따라가면 안정감은 있는데 내 발자국이 흐려지고,
내가 길을 만들겠다고 숲으로 들어가면 낭만은 있는데 가끔 멧돼지 나옴.
인생이라는 게 꼭 그렇다.
지도대로 가면 재미없고,
지도 없이 가면 불안하다.
그래서 인간은 지도와 우연 사이에서 계속 흔들린다.

“너 뭐하고 있니.”

이 질문은 이상하게 추궁처럼 들리기도 하고,
걱정처럼 들리기도 하고,
초대처럼 들리기도 한다.
마치 내 안의 어떤 존재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 것 같다.
너 지금 세상이 시키는 거 하고 있니.
아니면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니.
너 지금 살아있는 척하고 있니.
아니면 정말 살아가고 있니.
너 지금 어디 있니.
정확히는, 너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니.

영화에 나온 화두랑도 일맥상통한다.
그때는 아무런 화두가 되지 않았던 말이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른다.
그게 참 신기하다.
화두라는 건 누가 던진다고 바로 열리는 게 아닌가 보다.
씨앗처럼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내 안의 계절이 맞아야 싹이 난다.
그때는 그냥 농담이었는데
지금 와서는 이상하게 내 인생 한가운데를 찌른다.

아마 화두도 다가올 때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준비되기 전에는 질문도 그냥 소음이다.
근데 어느 정도 흔들리고, 실패하고, 잃어보고, 다시 일어나려 하고,
내가 나를 속이던 방식들이 조금씩 들통나기 시작하면
예전에 들었던 말들이 다시 찾아온다.
그 말들이 갑자기 깊어진다.
사실 말이 깊어진 게 아니라 내가 깊어진 걸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좀 파인 걸 수도 있고.
삽질을 많이 하면 사람도 깊어지긴 한다.
문제는 삽질이 너무 많으면 구덩이에서 못 나온다는 거지만.

이뭣고.

이게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내가 찾는 길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하고 있는 나는 또 누구인가.

근데 너무 거창하게만 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너 뭐하고 있니”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대답을 완성해야 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나를 숨기지 않고 봐야 하는 것 같다.

나 지금 헤매고 있다.
근데 그냥 헤매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표지판을 만들고 있다.
나 지금 흔들리고 있다.
근데 무너지는 흔들림만은 아니다.
가끔은 뿌리내리기 전의 흔들림일 수도 있다.
나 지금 길을 찾고 있다.
근데 어쩌면 찾는 동안 이미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대답은 이 정도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질문 앞에 서 있다.
세상의 기준과 마음의 소리 사이에서,
농담과 진지함 사이에서,
착란과 통찰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길이 생기는 지점을 지나고 있다.

너 뭐하고 있니.

나는 지금
나를 찾는 중이다.
근데 너무 비장하게 찾지는 않으려고 한다.
오늘도 내 안쪽 좌표를 다시 찍어본다.

이뭣고.
그리고 동시에,

밥먹고 싶다고 울리는 이 자리, 그게 지금의 자리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