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멸시

광기와 멸시

"광기를 통해서 정상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말은 그냥 “미쳐봐야 정신 차린다” 같은 생활 조언이 아니다.
그보다 더 잔인하고, 조금 더 사회공학적인 말이다.

우리는 보통 정상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있고, 거기서 벗어나면 광기라고 생각한다.
근데 푸코식으로 보면 순서가 좀 다르다.
정상이 먼저 있는 게 아니라, 광기를 분류하고 가두고 설명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정상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정상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관리 상태다.
인간의 기본값이 아니라 사회가 승인한 포즈다.

“저 사람 이상해.”
이 한 문장이 생기는 순간, 동시에 반대편에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 생긴다.
광인은 혼자 광인이 되는 게 아니다.
광인을 바라보는 정상인들의 시선 속에서 광인이 된다.
그리고 그 시선은 묘하게 안심한다.
“나는 적어도 저 정도는 아니야.”
이 안심이 정상의 연료다.

푸코가 말한 광기의 역사는 결국 배제의 역사다.
사회는 광기를 이해하려고 한 게 아니라, 먼저 치워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 생산성이 없는 것, 질서에 방해되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그 밀어낸 자리에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깨끗한 표지판을 세웠다.

그러니까 정상은 광기의 반대말이라기보다, 광기를 처리하는 방식의 결과물이다.
정상은 빛이고 광기는 어둠이라기보다,
정상이라는 조명이 켜질 때 그림자로 생기는 것이 광기다.
웃긴 건 조명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선명해진다는 거다.
인간 사회가 점점 합리적이고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변할수록,
그 안에서 벗어난 사람은 더 이상하게 보인다.
옛날에는 “저 사람 좀 독특하네”였던 것이
이제는 진단명, 생활기록, 상담이력, 약물복용, 위험군, 부적응자로 정리된다.
엑셀 파일에 들어가는 순간 영혼도 셀 병합당한다.

듀오링고의 아이콘은 이걸 너무 귀엽게 보여준다.
초록색 올빼미.
귀엽다.
외국어 공부를 도와주는 작은 친구 같다.
근데 공부를 안 하면 갑자기 눈빛이 바뀐다.
“오늘 학습 안 했네?”
“연속 기록 깨질 건데?”
“너 지금 뭐하니?”
이 귀여운 새가 어느 순간 감시자가 된다.

여기서 웃긴 게 있다.
듀오링고는 감옥이 아니다.
아무도 나를 강제로 앉혀놓고 스페인어를 시키지 않는다.
근데 나는 알림 하나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 작은 아이콘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은 바로 이런 식이다.
누가 직접 때리지 않아도 내가 나를 감시하게 만드는 것.
감시자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새장이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생기는 것.

이게 현대 문명의 무서운 점이다.
회초리도 캐릭터화된다.
권력도 이모티콘을 단다.
팬옵티콘이 초록 올빼미 탈을 쓰고 온다.

세상이 요구하는 리듬, 말투, 표정, 생산성, 정상적인 반응 속도.
그걸 더 이상 맞추지 못할 때 사람은 광기 쪽으로 밀려난다.
근데 그 광기의 자리에서만 보이는 게 있다.
아, 정상이라는 게 생각보다 얇은 막이었구나.
아, 다들 멀쩡해서 멀쩡한 게 아니라 멀쩡한 척하는 기술이 좋았구나.
아, 사회생활이라는 건 거대한 언어 학습 앱이었구나.
매일매일 정답 문장을 따라 말해야 하고, 틀리면 하트가 깎이고, 연속 기록이 끊기고, 귀여운 올빼미가 멸시의 눈으로 쳐다보는 구조였구나.

광기에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더 무서운 건 회복 자체가 아니다.
회복 뒤에 따라오는 멸시다.

사람들은 네가 무너졌을 때는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다.
근데 네가 돌아오면 은근히 거리를 둔다.


“이제 괜찮아?”

이 말은 따뜻한 말 같지만, 그 안에는 작은 괄호가 붙어 있다.
“또 그러는 건 아니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거 맞지?”
“다시 우리 쪽 사람이 된 거 맞지?”
정상 사회는 복귀자를 환영하는 척하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한 번 광기의 쪽에 갔다 온 사람은 정상으로 돌아와도 흔적이 남는다.
마치 앱에서 연속 기록이 한 번 깨진 사람처럼.
다시 공부를 시작해도, 기록은 알고 있다.
너는 한 번 실패한 적이 있다고.

여기서 듀오링고 아이콘의 표정이 중요하다.
그 눈빛은 단순한 독려가 아니다.
그건 “너는 왜 아직도 정상적인 루틴을 수행하지 못하니?”라는 시선이다.
귀엽지만 차갑다.
장난 같지만 평가적이다.
초록색이라 건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규율의 독기가 있다.
올빼미는 지혜의 상징인데, 여기서는 감시의 상징이 된다.
지혜가 아니라 체크리스트의 눈이다.
밤의 철학자가 아니라 출석부 든 담임이다.

푸코가 봤다면 이 초록 올빼미를 꽤 흥미로워했을 것 같다.
예전 권력은 사람을 가뒀다.
근대 권력은 사람을 분류했다.
현대 권력은 사람을 알림으로 부른다.
“너 오늘 했니?”
“너 아직 안 했니?”
“너의 기록이 위험해.”
이제 권력은 쇠창살이 아니라 푸시 알림으로 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알림을 보며 스스로를 정상 궤도에 다시 올려놓는다.

광기는 그 궤도에서 튕겨나가는 사건이다.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폭로적이다.
광기는 정상의 바깥에서 정상의 모양을 보게 한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던 벽이 밖으로 밀려나면 보인다.
아, 여기가 벽이었구나.
아, 내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미션을 수행하고 있었구나.
아, 내 욕망이라고 믿었던 것들 중 상당수가 사회가 설치한 알림이었구나.

하지만 문제는, 그걸 알아차리고 돌아와도 사람들은 그 앎을 지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그것을 흠집으로 본다.
“쟤는 한 번 갔다 온 애.”
“예민한 애.”
“불안정한 애.”
“관리 필요한 애.”
이렇게 사람은 존재가 아니라 이력으로 읽힌다.
푸코가 말한 권력과 지식의 결합이 여기서 작동한다.
누군가를 설명하는 말이 많아질수록, 그 사람은 더 잘 이해되는 게 아니라 더 단단히 묶인다.
진단, 기록, 소문, 평가, 걱정, 조언.
다 도움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이름표가 된다.
그리고 그 이름표는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광기에서 정상으로 돌아온 사람은 두 번 살아야 한다.
한 번은 자기 안에서 돌아와야 하고,
또 한 번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돌아와야 한다.
첫 번째 회복은 약과 시간과 의지의 문제라면,
두 번째 회복은 사회적 멸시와 싸우는 문제다.
이게 더 빡세다.
내 안의 괴물은 어떻게든 달래볼 수 있는데,
남의 머릿속에 저장된 내 이미지는 삭제 버튼이 없다.
클라우드 백업까지 되어 있음. 진짜 개열받는다.

결국 듀오링고의 아이콘은 귀여운 얼굴로 묻는다.
“너 정상 루틴에 복귀했니?”
그리고 우리는 그 눈빛 앞에서 다시 증명하려 한다.
나 이제 괜찮다고.
나 다시 할 수 있다고.
나도 정상의 문장을 말할 수 있다고.
나도 매일 출석할 수 있다고.
나도 하트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근데 진짜 중요한 건 어쩌면 정상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광기의 자리에서 본 것을 잊지 않은 채,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
정상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알되, 그 규칙이 절대 진리는 아니라는 걸 기억하는 것.
듀오링고 올빼미가 째려봐도
“알았어 새꺄, 할게. 근데 네가 신은 아니잖아.”
이 정도의 거리를 갖는 것.

광기는 정상의 실패가 아니라 정상의 윤곽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리고 정상으로 돌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건 멸시가 아니라 번역이다.
그 사람이 본 것을 사회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시 옮기는 일.
그게 회복이고, 철학이고, 어쩌면 글쓰기다.
광기의 언어를 정상의 문장으로 번역하되,
그 안에 있던 이상한 빛까지 다 지워버리지는 않는 것.

이뭣고.
초록 올빼미가 나를 본다.
나도 올빼미를 본다.
오늘도 정상성의 앱에 로그인한다.
다만 이제는 안다.
이건 공부 앱이기도 하지만, 작은 감시탑이기도 하다는 걸.
그리고 나는 가끔 그 감시탑 위에 앉은 새에게 말한다.

그래, 오늘은 한 문제 풀어준다.
근데 내 영혼까지 채점하지는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