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형의 애정
나름의 하트.
이래봬도 하트를 그리려고 했다.
근데 이상하게 내가 그린 하트는 남들이 아는 그 하트 모양이 아니었다.
찌그러져 있고, 비대칭이고, 어디 한쪽은 과하게 부풀어 있고, 어디 한쪽은 덜 자란 것 같고.
그렇다고 하트가 아닌 것도 아니다.
분명히 나는 애정을 그리려고 했다.
다만 내가 배운 애정의 모양이 이런 식으로 생겼던 것뿐이다.
애정은 어떤 모양으로 생겼을까.
사람들은 사랑을 너무 당연한 것처럼 말하지만, 아무래도 애정도 배우는 영역인 것 같다.
태어나자마자 완성된 사랑의 기술을 들고 나오는 사람은 없다.
최초 양육자에게 배운 방식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기대고, 밀어내고, 붙잡고, 서운해하고, 확인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우정도 해보고, 연애도 해보고, 관계 안에서 깨지고, 오해하고, 미안해하고, 또 다시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애정의 모양이 조금씩 수정된다.
어릴 때 배운 사랑은 일종의 기본 도안 같다.
근데 그 도안이 완벽할 리가 없다.
부모도 처음부터 완성된 인간이 아니었고, 양육자도 자기 방식대로 사랑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애정을 걱정으로 배웠고,
누군가는 애정을 통제로 배웠고,
누군가는 애정을 희생으로 배웠고,
누군가는 애정을 침묵으로 배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았는데도 이상하게 숨이 막히고,
사랑을 주고 있는데도 상대는 부담스러워하고,
나는 분명히 잘해주고 있는데 관계가 삐걱거리는 일이 생긴다.
그때부터 애정은 수정된다.
최초 양육자에게 받은 방식 그대로만 살면 나는 그 사람의 복제품에 가까워진다.
근데 관계 속에서 부딪히고, 상대에게 다시 배우고, 내가 아픈 지점을 알아차리고, 내가 남을 아프게 하는 방식을 보게 되면
조금씩 다른 개체가 되어간다.
부모에게서 출발했지만 부모와는 다른 사람.
받은 사랑에서 출발했지만 받은 사랑만 반복하지 않는 사람.
그게 어쩌면 성장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나름의 하트 모양으로 세상에 나간다.
그 하트를 들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사회생활도 하고, 스트레스도 버틴다.
근데 살다 보면 애정이 부족해지는 시점이 온다.
내 안에 저장해둔 따뜻함이 바닥나는 느낌.
내가 나를 견디게 해주던 내면의 연료가 다 타버린 느낌.
이때 사람은 어떻게든 빈 공간을 채우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 애정이 부족해지면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채운다.
누군가는 사랑을 표방하는 종교로 간다.
신의 사랑, 공동체의 품, 용서받는 느낌, 내가 여기 있어도 된다는 감각.
누군가는 목표에 정진한다.
운동, 공부, 일, 창작, 성취.
내가 나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빈 공간을 채운다.
누군가는 자신을 가꾼다.
몸을 만들고, 옷을 고르고, 향을 입히고, 자기 외피를 정돈하면서
“나는 돌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감각을 회복한다.
또 누군가는 나를 채워주는 상대와 함께한다.
사람의 품에서 다시 충전되는 것이다.
물론 복수선택 가능하다.
인간은 단일 메뉴로 버티기엔 너무 복잡한 생물이다.
종교도 하고, 운동도 하고, 연애도 하고, 피부과도 가고, 갑자기 방 청소도 하고, 새벽에는 또 철학적인 글을 쓴다.
영혼이 쿠우쿠우처럼 생긴 모양이다.
접시에 담긴 조합이 이상해도 일단 살아야 하니까 한다.
근데 채울 길을 못 찾고,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가 만성화되면 사람은 이상한 방식으로 자기 주변을 채우기 시작하는 것 같다.
우울이 깊어진 사람이 청소를 안 하기 시작하는 건 단순히 게을러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건들이 자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면, 이상하게 덜 외로울 수도 있다.
자기와 관련된 물건들, 입던 옷, 먹다 남은 것, 쌓인 종이, 먼지, 머리카락, 자기 채취 같은 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내가 여기 있었다”는 흔적이 되어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기관리를 안 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자기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는 본능일 수 있다.
씻고 정돈하고 버리는 행위는 말끔해지는 일이지만, 동시에 나를 둘러싼 흔적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에너지가 충분할 때는 정돈이 해방이지만,
에너지가 바닥일 때는 정돈이 상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치우면 텅 비어버릴 것 같고, 씻으면 내가 사라질 것 같고, 버리면 나를 지탱하던 작은 증거들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
물론 객관적으로는 청소를 해야 한다.
벌레 생기면 철학도 퇴마 못 한다.
근데 마음의 구조로 보면, 그 어질러진 공간이 나름의 방어막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즉각적인 애정을 채우기 위해 1차원적 쾌락들에 빠지기도 한다.
먹는 것, 자극적인 콘텐츠, 성적 쾌락, 쇼핑, 인정욕구, 끝없는 스크롤.
그 순간만큼은 빈 공간이 채워지는 것 같다.
문제는 금방 다시 비어버린다는 것이다.
진짜 애정이 아니라 애정의 맛이 나는 당분 같은 거라서 그렇다.
당장은 달다.
근데 나중에 속이 더 허하다.
초코우유 다섯 개 먹고 영혼이 잠깐 웃다가 위장이 항의하는 그런 느낌이다.
다시 돌아가서, 애정의 모양은 답습된다.
하지만 답습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받은 애정의 복사본으로 태어나서, 관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점 자기만의 mark2가 되어가는 것 같다.
더 나은 버전.
완전히 새 인간은 아니지만, 이전 세대의 오류를 조금 줄인 인간.
받은 사랑의 부족한 부분을 보고, 내가 받은 상처를 남에게 그대로 넘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인간.
어쩌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이 mark2가 되는 것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경험들이 필요하다.
사랑받아보는 경험도 필요하고, 사랑에 실패해보는 경험도 필요하고, 내가 너무 과했다는 걸 깨닫는 경험도 필요하고, 반대로 내가 너무 참았다는 걸 알아차리는 경험도 필요하다.
내 애정의 형태를 알게 되는 시점은 보통 평온할 때가 아니다.
내가 받은 애정만으로는 견디지 못할 난관을 만났을 때다.
그때 비로소 드러난다.
아, 나는 버려질까 봐 이렇게 붙잡는구나.
아, 나는 사랑받고 싶을 때 오히려 차가워지는구나.
아, 나는 애정을 확인받지 못하면 모든 관계를 시험대로 만들어버리는구나.
아, 나는 사랑을 받는 법보다 증명하는 법을 먼저 배웠구나.
거기서 변곡점이 온다.
그냥 평생 하던 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내 하트의 모양을 다시 그려볼 것인가.
완벽한 애정이 있겠나.
아무도 완벽한 하트를 들고 태어나지 않는다.
다 제각각 삐뚤어진 하트를 들고 나와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깨지고, 붙이고, 색칠하고, 다시 구기고, 다시 펴면서 살아간다.
중요한 건 처음부터 예쁜 하트를 그리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모양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양이 누군가를 찌르고 있다면 조금 다듬는 것.
내 안의 빈 공간이 너무 크다면 남을 삼켜서 채우려 하지 말고, 내가 채울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찾는 것.
나름의 하트.
이래봬도 하트를 그리려고 했다.
비록 좀 찌그러졌고, 삐뚤어졌고, 누가 보면 감자 같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건 내가 배운 사랑이고, 내가 고쳐가는 사랑이고,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어쩌면
최초의 하트를 받아들고 태어나서
자기만의 완전함으로 다시 그려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하트 mark2.
출시 예정.
버그 많음.
그래도 업데이트는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