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공감
공감이라는 건 동화가 되어보는 것 같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단순히 정보를 받는 게 아니라, 잠깐 상대의 아바타에 접속해보는 일이다.
그 사람의 몸에 들어가고, 그 사람의 시야로 보고, 그 사람의 기억과 상처와 욕망이 섞인 조종석에 앉아보는 것.
근데 문제는 내가 그 사람의 아바타에 접속해도 결국 조종하는 건 나라는 점이다.
나는 내 감각으로 상대를 느낀다.
내 경험, 내 상처, 내 언어, 내 상상력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번역한다.
그러니까 공감은 정확한 접속이라기보다 불완전한 원격 조종이다.
상대는 분명히 울고 있는데, 나는 그 눈물의 온도를 내 식대로 느낄 뿐이다.
상대는 분명히 분노하고 있는데, 나는 그 분노가 모욕감인지, 억울함인지, 버려짐의 공포인지, 그냥 배고파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인간은 감정을 그대로 전송할 수 없다.
블루투스 감정 공유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업데이트가 안 됐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 표정으로,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어떻게든 자기 안쪽을 밖으로 꺼낸다.
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상대의 느낌을 제대로 추측하려면 한 사람에 대한 경험이 꽤 필요하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자빠지는지, 어떤 말에 예민한지, 어떤 종류의 다정함을 좋아하는지, 어떤 침묵을 버려짐으로 받아들이는지.
이런 것들을 오래 봐야 한다.
공감은 재능이기도 하지만 데이터이기도 하다.
그 사람을 오래 겪어야만 생기는 감정의 지도 같은 것.
처음 만난 사람에게 “완전히 이해해”라고 말하는 건 사실 좀 오만한 일일 수 있다.
이해했다기보다 내 안의 비슷한 감정을 꺼내서 비춰본 것에 가깝다.
그리고 감정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도 숙제가 있다.
듣는 이가 자신의 깊이를 따라오게 하려면 어느 정도 흡인력 있는 콘텐츠를 보여줘야 한다.
내가 깊다고 해서 남들이 자동으로 그 깊이에 빠져주는 건 아니다.
우물도 입구가 있어야 내려간다.
그 입구는 말일 수도 있고, 그림 한 장일 수도 있고, 책 한 권일 수도 있고, 3분짜리 음악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긴 설명보다 사진 한 장으로 자기 감정을 더 정확히 전달하고,
어떤 사람은 농담 하나에 자기 인생의 외로움을 숨겨놓는다.
감정은 꼭 진지한 얼굴로만 전달되는 게 아니다.
가끔은 웃긴 밈 하나가 긴 고백보다 더 정확하다.
인간의 영혼이 jpg로 압축되는 시대다.
그렇게 우리는 반응을 본다.
그 반응들을 통해 전달의 정도를 어림짐작할 뿐이다.
정확한 이해란 있기 어렵다.
아마 평생 어렵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오해를 조금씩 수정하며 가까워지는 것에 가깝다.
관계란 결국 오역 교정 작업이다.
회의록은 없고 감정만 남는다.
퍼블릭을 노린다면 방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머니코드나 클리셰처럼 이미 검증된 템플릿을 사용하면 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서사, 익숙한 자극, 실패와 성공의 구조, 상처와 회복의 공식,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이야기,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결국 빛나는 이야기.
이런 것들은 오래 검증된 감정의 고속도로다.
타면 빠르다.
문제는 너무 많이 달려서 길이 닳았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것들도 낡았다.
사람들은 이제 클리셰를 알아본다.
감동 포인트도 알고, 눈물 버튼도 알고, 광고의 냄새도 맡는다.
게다가 각자의 사고방식이 핵개인화되고 있다.
예전에는 모두가 비슷한 드라마를 보고 비슷한 유행가를 듣고 비슷한 시간대의 뉴스를 봤다면,
이제는 각자 자기 알고리즘의 동굴에서 산다.
한 사람은 자기계발 숏츠의 세계에 있고,
한 사람은 음모론의 세계에 있고,
한 사람은 고양이 릴스의 세계에 있고,
아주 그냥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이다.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 서로 다른 행성어처럼 들린다.
그래서 이해의 간극은 점점 커진다.
우리는 점점 많은 콘텐츠를 보지만, 점점 덜 만난다.
점점 많은 감정을 소비하지만, 점점 덜 나눈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비슷한 콘텐츠를 본 적이 있을 뿐이고,
누군가의 외로움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외로움 패키지를 시청했을 뿐이다.
공감도 대량생산된다.
“당신이 지친 이유.”
“사람에게 상처받은 당신에게.”
“혼자인 게 편하지만 외로운 사람 특징.”
이런 영상들이 나를 너무 잘 알아준다.
웬만한 공감은 이제 공감 콘텐츠들이 해주고 있지않나.
사람보다 유튜브에서 위로를 더 받는다.
사람에게 말하면 설명해야 하고, 오해받을 수도 있고, 괜히 분위기 무거워질 수도 있는데
콘텐츠는 내가 원하는 만큼만 다정하다.
멈출 수도 있고, 넘길 수도 있고, 댓글에서 비슷한 사람들을 볼 수도 있다.
사람은 부담스럽고, 콘텐츠는 편하다.
사람은 나를 실망시키지만, 알고리즘은 적어도 다음 영상을 준다.
현대인의 애착 대상이 점점 사람에서 피드로 이동하는 느낌이다.
이거 약간 문명 단위의 회피형 애착 같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고립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완전히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고립은 현대의 기본값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줄일 수는 있을 것 같다.
정확한 이해를 포기하고, 불완전한 접속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너를 완전히 이해해”보다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네가 말하는 쪽으로 조금 더 가볼게”가 더 진짜에 가깝다.
공감은 정답을 맞히는 게 아니라 상대의 세계에 잠깐 머물러보는 것이다.
상대의 방에 들어가서 가구 배치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일단 신발 벗고 앉아보는 것.
그리고 자기 감정을 보여주는 사람도 자기 세계의 입구를 만들어야 한다.
너무 깊은 곳에서만 말하면 아무도 못 따라온다.
깊이는 필요하지만, 계단도 필요하다.
그 계단이 글이고, 음악이고, 그림이고, 농담이고, 밥 한 끼고, 산책이고, 조용한 대화일 수 있다.
고립을 해결하는 건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번역일지도 모른다.
내 안의 감정을 상대가 들어올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일.
그리고 상대가 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잠깐 앉아 있다 가는 것을 허락하는 일.
우리는 저마다의 세상에 고립되어 있다.
맞다.
근데 그 세상에 창문 하나 정도는 낼 수 있다.
문까지 열기 무서우면 창문부터 열면 된다.
그리고 누군가 그 창문 밖에서 말한다.
“나도 비슷한 날씨야.”
그 정도면 시작이다.
완전한 이해는 없을지 몰라도,
같은 비를 맞고 있다는 감각은 생길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