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한 자아가 불편한 이유에 대한 병리학적 논의
누군가의 비대한 자아를 볼 때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 내가 작게 느껴져서일까.
처음에는 그런가 싶었다.
저 사람이 너무 크게 자신을 펼치니까, 그 옆에 있는 내가 상대적으로 작아지는 느낌.
마치 좁은 방에 너무 큰 가구가 들어왔을 때처럼, 내 몸 둘 곳이 없어지는 감각.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엔 그 속에 있는 탐욕 때문이다.
비대한 자아는 단순히 자신감이 큰 게 아니다.
그건 주변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마음이다.
좋은 자리, 좋은 시간, 좋은 사람들, 좋은 분위기.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순수하게 누리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전부 자기 존재의 증거가 되길 바라는 마음.
“나는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이야.”
“나는 이 정도 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야.”
“나는 저 사람들을 잘 알아.”
이런 식으로 자기 이미지를 증식시킨다.
이상하게 그런 사람은 타인을 타인으로 잘 두지 않는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서사의 장식으로 가져간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 친한 자신을 좋아한다.
좋은 공간에 가면 그 공간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 공간에 있는 자신을 찍는다.
그러니까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저 사람의 자아가 커서 내가 작아지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자꾸 세계를 자기 몸처럼 쓰려고 해서 불편한 것이다.
좀 과장하면 인간 와이파이 공유기 같다.
근처에 있는 모든 걸 자기 이름으로 연결하려고 함.
편하다는 느낌은 온전히 받아줄 때 생긴다.
내 몸을 받아주는 의자.
내 발 모양을 받아주는 신발.
내 성격과 취향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
그런 것들 앞에서 사람은 긴장을 푼다.
몸도 마음도 편한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인간은 대단히 고차원적인 척하지만, 결국 덜 아픈 쪽으로 굴러가는 생물이다.
그래서 항상 찌들어 사는 사람에겐 밝은 성격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밝음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밝음이 나를 받아주지 못할 것 같아서.
내 피로와 냉소와 찌든 표정을 그 사람의 세계에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반대로 나처럼 조금 찌든 사람을 만나면 이상하게 편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기가 있다.
누가 더 힘들었는지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서로의 구겨짐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나보다 더 편한가”라는 감각이 생긴다.
이 상대적인 녀석이 사회를 움직이는 에너지 중 하나인 것 같다.
나는 불편한데, 쟤는 왜 저렇게 편하지.
나는 참고 있는데, 쟤는 왜 저렇게 누리지.
나는 찌들어 있는데, 쟤는 왜 저렇게 해맑지.
이런 감각이 쌓이면 사람은 주변도 나와 비슷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편해지기 어렵다면, 적어도 남들도 조금은 불편했으면 하는 마음.
그게 약하게는 복지를 바라는 마음이 되고, 더 강하게 가면 체제 전복까지 꿈꾸게 되는 것 아닐까.
물론 이게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복지는 필요한 것이고, 사회는 불공평함을 줄여야 한다.
다만 그 안에 “나만 이렇게 버티는 건 억울하다”는 감정도 분명 섞여 있다.
사람은 순수한 정의감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의감 옆에는 언제나 피로와 질투와 억울함이 같이 앉아 있다.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우리는 작은 땅덩어리에서 옹기종기 산다.
다들 서로를 너무 가까이 본다.
남의 표정, 남의 옷, 남의 연봉, 남의 여유, 남의 밝음.
그런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니까 마음의 정토를 딴 데서 찾으려고 한다.
조용한 산, 종교, 여행
조금 아쉽기도 하다.
아! 쟤는 저런 사람이구나.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다른 판단은 하지 않는 것.
이게 가능하면 참 좋을 텐데, 쉽지 않다.
그래서 이상적인 세상은 메시아가 와도 오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 완벽한 답을 가져와도 인간은 또 그 답을 자기 식대로 오해할 것이다.
결국 세상은 정답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정반합으로 밀고 당기며 조금씩 나아갈 뿐이다.
한쪽이 너무 커지면 반대쪽이 생기고, 그 충돌 속에서 또 다른 모양이 나온다.
인간 사회는 거대한 토론장이라기보다, 오래 끓이는 찌개 같다.
가끔 쫄고, 타고 해도 그래도 계속 저어야 한다.
진정한 우리는 무엇일까.
우리.
너와 나.
근데 이상하게 나 혼자 살아도 “내 집”보다 “우리집”이라고 말한다.
우리집에 와.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
실제로는 나 하나의 공간인데, 말 속에는 이미 누군가가 같이 산다.
어쩌면 “우리”라는 말은 실제 인원수가 아니라 소속감의 흔적인 것 같다.
내가 혼자 있어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길 바라는 마음.
나를 만든 사람들, 나와 연결된 시간들, 내 안에 남아 있는 관계들이 같이 들어 있는 말.
그래서 우리집이라고 할 때의 우리는 가족일 수도 있고, 기억일 수도 있고, 내가 기대고 싶은 어떤 공동체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글을 적다 보면 생각이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꺾일 때가 있다.
처음에는 비대한 자아에 대해 쓰고 있었는데, 어느새 편안함의 정치로 가 있고, 그러다 갑자기 “우리”라는 말의 정체를 묻고 있다.
쓸 때는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느껴진다.
내 머릿속에서는 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근데 다 쓰고 나서 검수해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
문단이 지리멸렬하다.
생각의 실이 연결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중간에 매듭이 아니라 그냥 엉킨 털뭉치였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ADHD인가 싶다.
생각이 직선으로 가지 않고 옆방 문을 계속 연다.
문 하나 열면 또 문이 있고, 그 안에 또 이상한 문장이 앉아 있다.
그래서 글을 쓰는 동안에는 뭔가 발견한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발견이라기보다 산책이었다.
근데 또 산책이 꼭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글이란 애초에 목적지까지 최단 거리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서 자꾸 멈추는지 보는 일이기도 하니까.
다만 문제는 독자가 따라올 수 있느냐다.
내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꺾임이어도, 바깥에서 보면 급커브일 수 있다.
그러니 글을 쓸 때 필요한 건 생각을 막는 게 아니라, 꺾이는 지점에 표지판을 세우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어져 있습니다.”
이런 표지판.
내 머릿속 골목길에 가로등 하나씩 세우는 일.
결국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건 자아, 편안함, 우리, 글쓰기에 대한 총합이다.
사람은 자기 자아를 펼치고 싶어 하고, 동시에 받아들여지고 싶어 한다.
남이 너무 크게 펼쳐지면 불편해하고, 내가 편해질 자리를 찾는다.
그러면서도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 “우리”라는 말을 쓴다.
이상하게도 그게 인간 같다.
앞뒤가 딱 맞는 존재가 아니라, 중간중간 꺾이고 새고 엉키는 존재.
그래도 그 엉킴을 풀어보려고 문장을 쓰는 존재.
완벽한 글은 아니어도, 적어도 내가 어디서 꼬였는지는 알게 해주는 것.
그러니까 오늘의 결론은 이 정도다.
비대한 자아는 세계를 자기 몸처럼 쓰려 해서 불편하고,
편안함은 나를 받아주는 자리에서 생기며,
우리는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고 싶은 말이고,
글쓰기는 그 모든 생각의 급커브에 가로등을 세우는 일이다.
뭐야.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처럼 삐걱대는 글자탑이 쌓여져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