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동물 — 당신의 료이키에 초대해주세요

영역동물 — 당신의 료이키에 초대해주세요

1. 영역동물, 당신의 료이키에 초대해주세요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필드가 달라짐에 따라, 우리는 공통된 언어를 잃어버린다.

한때 '좋은 삶'이라는 말에는 비교적 선명한 그림이 따라붙었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결혼, 집. 그 그림이 정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모두가 같은 그림을 보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같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대화가 쉽다. "요즘 어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대충 같은 좌표계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에게 '성공'은 조기 은퇴이고, 누군가에게는 팔로워 수이고,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다. 같은 단어를 쓰는데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다. 언어는 남아 있지만 사전은 사람 수만큼 쪼개졌다.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1979년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이 상황에 미리 이름을 붙였다. 그는 포스트모던을 '거대서사(metanarrative)에 대한 불신'으로 정의했다. 인류는 진보한다, 이성은 해방을 가져온다, 역사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간다. 이런 큰 이야기들이 개별 삶에 의미를 공급하던 시대가 끝나고, 작은 이야기들이 흩어져 저마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이 말을 했을 때 그것은 예언에 가까웠다.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그건 그냥 우리의 일상이다.

의미는 해체되고, 각자는 각자의 언어를 세우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은 코로나가 마련해 주었다.

팬데믹은 거대한 강제 실험이었다. 출근이, 회식이, 명절이, 결혼식이 한꺼번에 멈췄다. 당연하게 여기던 의례들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것들이 정말 필요했는지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이는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일이 굴러간다는 걸 알았고, 어떤 이는 관계의 절반이 사실 습관이었다는 걸 알았다. 의례가 멈춘 자리에 각자는 혼자 남았고, 혼자 남은 사람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럼 나는 뭘 좋아하지? 나는 뭘 위해 살지?

각자가 자신만의 의미를 재구성하기 위해, 누군가의 의미들을 수집한다.

그 시기에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 보면 흥미롭다. 남의 브이로그를 보고, 남의 책장과 남의 루틴과 남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여다봤다. 그건 단순한 구경이 아니라 일종의 채집이었다. 의미의 재료를 모으는 일. 자기만의 집을 짓기 위해 남의 집 설계도를 훔쳐보는 일.

그중 강하게 의미를 뿜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영역이 생겨나기도 한다.

인플루언서라는 말이 그 현상을 가리키지만, 그 말은 너무 상업적이라 본질을 가린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좀 더 원초적이다. 강한 의미를 가진 사람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 사람의 언어를 빌려 쓰기 시작하고, 그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작은 부족이 생긴다. 거대서사가 사라진 자리에 수많은 작은 부족이 생겨난 것이다.

오늘 생각해 본 내용은 개인의 영역에 대해서다.

일본어로 영역(領域)은 '료이키'라고 읽는다. 요즘은 애니메이션 덕분에 '영역 전개'라는 말이 꽤 알려졌다. 자기만의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을 펼쳐 상대를 그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설정이다. 만화적 과장이지만 묘하게 정확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을 하나씩 갖고 있고,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건 결국 그 공간에 초대받는 일이니까.

개인의 영역이 세워지기까지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학습, 경험들이 필요하다. 옳고 그름에서 아름다움과 추함, 무감흥이 생기고, 그런 것들이 쉴 새 없이 쌓이다 보면 취향이 생긴다.

여기서 하나 짚고 싶은 건, 취향이 '좋아함'보다 '싫어함'에서 먼저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별짓기』(1979)에서, 취향이란 계급과 교육과 성장 환경이 몸에 새긴 성향, 그가 '아비투스'라고 부른 것의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취향이 무엇보다 먼저 '혐오'라고 썼다. 타인의 취향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그게 취향의 맨얼굴이라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통찰은 이렇다. 취향은 대상을 분류하지만, 동시에 분류하는 사람을 분류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그러니 취향은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경계선이다. 여기까지가 나, 저기부터가 남. 영역의 첫 번째 울타리는 그렇게 세워진다.

감흥은 도파민에서 나오고, 도파민이 나오는 회로가 곧 내 길이 된다.

신경과학의 언어로 조금 더 정확히 말해 보면 이 문장은 더 흥미로워진다. 1990년대 볼프람 슐츠의 원숭이 실험 이후로, 도파민은 '쾌락 물질'이라기보다 '예측 오차 신호'로 이해된다. 기대보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도파민 뉴런이 크게 발화하고, 기대만큼이면 잠잠하고, 기대보다 못하면 오히려 활동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도파민은 '좋다'는 신호가 아니라 '생각보다 좋다, 이쪽으로 더 가 봐'라는 신호다. 켄트 베리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원함(wanting)'과 '좋아함(liking)'을 구분했다. 도파민이 주로 담당하는 건 원함 쪽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계속 찾게 되는 건, 그걸 정말 좋아해서라기보다 뇌가 그쪽에 뭔가 더 있으리라 예측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그리고 1949년 도널드 헵이 제안한 원리가 있다. 흔히 '함께 발화하는 뉴런은 함께 연결된다'는 문장으로 요약되는 원리다. 자주 쓰는 회로는 굵어지고, 쓰지 않는 회로는 가늘어진다. 숲속에 사람이 자주 다니면 길이 나는 것과 같다.

이 둘을 합치면, '도파민이 나오는 회로가 곧 내 길이 된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꽤 문자 그대로의 기술이 된다. 예측보다 좋았던 경험이 그쪽으로 다시 가게 만들고, 다시 가면 길이 굵어지고, 굵어진 길은 다음 선택을 더 쉽게 만든다. 취향은 그렇게 몸에 새겨진다. 그리고 그 길들이 모여 지도가 되면, 그게 영역이다.

그 영역은 단단하게 굳어져 실제로 자신의 영역처럼 인식하게 되는데, 그 증거는 누군가 내 취향을 비판했을 때 드는 적개심이다.

이상한 일이다.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밴드를 별로라고 했을 때, 내 몸이 다친 것도 내 재산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기분이 상한다. 이 반응을 설명하려면, 취향이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나 자체'로 경험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1890년 『심리학의 원리』에서 자아를 몸과 마음뿐 아니라 내 옷, 가족, 집, 평판, 작품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물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라고 부른 것들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이것들이 상처 입을 때 마치 내 몸이 다친 것처럼 위축된다. 취향은 그 확장된 자아의 가장 바깥쪽 경계다. 그래서 거기를 건드리면 아프다.

영토가 크다면 그중 하나를 건드려도 크게 반응하지 않겠지만, 작다면 더 소중하기에 크게 반응할 것이다.

동물행동학에도 비슷한 관찰이 있다. 텃세를 부리는 동물들은 영역의 가장자리보다 중심부, 그러니까 둥지나 굴에 가까운 곳에서 훨씬 격렬하게 싸운다. 가장자리는 내줘도 되지만 중심은 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토가 작은 사람에게는 가장자리가 없다. 모든 곳이 중심이다. 그래서 어디를 건드려도 둥지를 건드린 것처럼 반응한다. 반대로 영토가 넓은 사람은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너그러울 수 있다. 너그러움은 성품이라기보다 면적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강제로 묶여 있어야 하는 지역, 학교, 군대, 회사에서는 일정 기간 동안 '상상 속 메인스트림'이라는 것에 묶여 있게 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수용소』(1961)에서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이라는 개념을 썼다. 병원, 감옥, 군대, 기숙학교처럼 잠자고 일하고 노는 모든 것이 하나의 권위 아래,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일정으로 이루어지는 곳.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이전의 자아를 벗고 기관이 정해 준 역할을 입는다. 한국 남자들에게 군대가 그토록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잠시 자기 영역을 압수당한다.

왜 상상 속이냐면, 그건 집단의 의지일 뿐이며 큰 집단에서 공유되는 어떤 지점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에는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라는 개념이 있다. 1930년대 플로이드 올포트와 대니얼 카츠가 이름 붙인 현상으로, 구성원 대부분이 속으로는 어떤 규범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다 동의하겠지'라고 믿기 때문에 그 규범을 따르는 상황을 말한다. 1990년대 프린스턴 대학의 음주 문화 연구가 유명하다. 학생 대부분이 캠퍼스의 과음 문화를 불편하게 느꼈지만, 동시에 다른 학생들은 그걸 즐긴다고 믿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규범이 모두의 오해 위에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 속 메인스트림'이란 바로 이것이다. 회식 2차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다들 간다. 다들 가니까 간다. 메인스트림은 실재하는 다수의 의지가 아니라, 다수가 서로에 대해 상상한 의지다.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이 민족을 '상상된 공동체'라고 불렀을 때 말하고 싶었던 것도 비슷하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수천만 명과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데, 그 소속감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상상된 것은 상상되는 동안 실제로 작동한다. 다만 상상이 멈추면, 그것도 멈춘다.

지금은 새로운 화폐의 등장, 권위를 잃은 우두머리, 새로운 기술의 등장 등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전통의 붕괴. 즉,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예견이 현실화된 것이다.

화폐도 결국 상상된 공동체다. 우리가 종이 한 장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모두가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가 아닌 코드가 발행하는 화폐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돈'이라는 가장 단단해 보이던 합의조차 다시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우두머리들도 마찬가지다. 막스 베버는 정당한 지배를 세 종류로 나눴다. 전통에 기댄 지배, 법과 절차에 기댄 지배, 그리고 개인의 비범함에 기댄 카리스마적 지배. 앞의 두 가지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전통은 촌스러워졌고, 제도는 신뢰를 잃었다. 남는 건 세 번째뿐이다. 그래서 요즘의 권위는 직함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나온다. 사람들이 '이 사람 말이라면 듣겠다'고 느끼는 개인. 앞에서 말한, 의미를 강하게 뿜는 사람들이다.

의미를 둘 곳이 없으니, 자기만의 의미를 세울 수밖에.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 말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붓다가 열반에 들기 전, 제자 아난다가 "스승님이 떠나시면 저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붓다가 남겼다는 말이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그런데 초기 경전의 팔리어 원문에서 '등불'로 옮겨진 단어 '디파(dīpa)'는 '등불'과 함께 '섬'이라는 뜻도 갖는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스스로를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아라'로 읽는다. 홍수 속에서 발 디딜 수 있는 땅. 한역(漢譯) 과정에서 등불 쪽이 선택되면서 동아시아에는 자등명이라는 말로 전해졌다.

나는 이 이중의 의미가 오늘의 주제와 정확히 겹친다고 생각한다. 거대서사라는 대륙이 물에 잠긴 시대에, 각자는 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섬에는 등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 영역이란, 등불이 켜진 섬이다.

하나 더 주목할 것은 붓다가 자등명만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늘 법등명을 함께 말했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어떤 원리에도 함께 의지하라고. 이 균형은 글의 마지막에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구체적으로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있다면 외국에 나갔을 때, 새로운 회사에 들어갔을 때, 혹은 자신의 영역이 무너졌을 때 등이다.

사회학자 알프레드 슈츠는 1944년 에세이 「이방인」에서 낯선 집단에 들어간 사람이 겪는 일을 분석했다. 집단 안의 사람들은 '평소대로의 생각(thinking-as-usual)'으로 살아간다. 왜 그렇게 하는지 묻지 않고, 그냥 그렇게 한다. 그 레시피가 지금까지 잘 작동해 왔으니까. 그런데 이방인에게는 그 레시피가 통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묻는 과정에서, 자기가 원래 속했던 집단의 레시피도 사실은 그저 하나의 레시피였을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1950년대 인류학자 칼레르보 오버그는 이 경험에 '문화 충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다른 세상에 나와 보니, 그동안의 '의미'들이 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그런데 나는 이 문장을 조금 고쳐 쓰고 싶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기보다는, '그 의미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라고. 의미는 있었다. 다만 그건 그 땅의 의미였다. 다른 땅에서는 다른 의미가 자란다. 이걸 깨닫는 순간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해방적이다.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나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니까.

2. 영역 싸움

가스라이팅이라고 불리는, 서로의 영역을 무너뜨리는 싸움이 발생한다.

이 단어는 1938년 영국 극작가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 「가스등」에서 왔다. 남편이 아내를 미치게 만들려고 집 안의 가스등을 몰래 어둡게 해 놓고, 아내가 불빛이 어두워졌다고 하면 그런 적 없다고 우긴다. 아내는 점점 자기 감각을 믿지 못하게 된다. 이 연극은 1944년 영화로 만들어졌고, 그 제목이 반세기 넘게 지나 심리학의 용어가 되었다.

가스라이팅이 무서운 건, 그것이 상대의 물건이나 몸이 아니라 '지각'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것, 내가 느낀 것, 내가 좋다고 여긴 것이 틀렸다고 반복해서 말하면, 상대의 영역, 그러니까 경험과 취향이 쌓여 만들어진 지도가 통째로 흔들린다. 지도가 무너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지도를 빌려 쓸 수밖에 없고, 그 순간 그는 남의 영토의 주민이 된다. 정복은 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그런 정복군주 같은 수법을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되었기에, 기미가 보이면 싸움을 붙지 않는다.

이건 꽤 큰 변화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그런 일들에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이름이 생겼고, 이름이 생기자 모두가 그 패턴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떤 대화에서 '어? 이거…' 하는 감각이 오면, 사람들은 반박하기보다 그냥 빠진다.

이건 실제 고정된 땅의 위치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나 관계 속에서의 위치에 관련된 '영역'이기 때문에 멀어지려면 그냥 멀어질 수 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1966년 『숨겨진 차원』에서 사람 사이의 거리를 넷으로 나눴다. 연인이나 가족에게만 허락되는 밀접 거리(약 45센티미터 이내), 친구 사이의 개인 거리(약 1.2미터까지), 업무 관계의 사회 거리(약 3.6미터까지), 그리고 강연자와 청중 사이의 공적 거리. 그는 이 거리들이 문화마다 다르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중요한 건 이 영역들이 몸에 붙어 다닌다는 점이다. 우리는 거품 같은 영역을 두르고 걸어 다닌다. 땅의 영역과 달리, 이 영역은 들고 이사할 수 있다.

심리적 영역은 이보다 더 유동적이다. 답장 속도를 늦추고, 약속을 미루고, 스토리를 숨기는 것만으로 거리는 조절된다. 고대의 부족은 마음에 안 드는 이웃이 있어도 이사를 갈 수 없었다. 우리는 언제든 갈 수 있다. 이 자유가 영역 싸움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꺾이거나 종속되거나 하는 싸움들이 지나고, 이제는 서로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나는 너 영역에 관심 끌게."

"너도 내 영역에 들어오지 마."

동물행동학에는 '친애하는 적 효과(dear enemy effect)'라는 개념이 있다. 1954년 영국의 조류학자 제임스 피셔가 이름 붙인 현상으로, 영역을 가진 동물들이 처음 보는 침입자보다 이미 경계가 확정된 이웃에게 훨씬 덜 공격적이라는 관찰이다. 몇 번의 다툼을 거쳐 경계선이 합의되고 나면, 이웃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다. 노래로 존재를 알리고, 서로의 선을 넘지 않는다. 싸움에 쓸 에너지를 아껴 먹이를 찾고 새끼를 키우는 데 쓴다.

우리가 도달한 단계가 이것이다. 수많은 영역 싸움을 거친 끝에, 우리는 서로를 친애하는 적으로 대하는 법을 배웠다. 선을 지키는 한, 너는 위협이 아니다.

정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건, 바로 여기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어의 '정(情)'은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정은 대체로 경계를 넘는 행위에서 생긴다. 묻지도 않고 반찬을 챙겨 주는 것,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것,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 것. 정은 본질적으로 침범이다. 다정한 침범. 그러니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문화에서 정이 줄어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침범이 없으면 상처도 없지만, 그 다정함도 없다.

쇼펜하우어는 1851년 『소품과 부록』에서 이 딜레마를 고슴도치 우화로 썼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이 체온을 나누려고 서로 붙으면 가시에 찔리고, 떨어지면 다시 춥다. 그렇게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서로 견딜 만한 적당한 거리를 찾는다. 쇼펜하우어는 사람 사이의 그 거리를 '예의'라고 불렀다. 우리 시대는 고슴도치들이 그 적당한 거리를 너무 잘 찾게 된 시대인지도 모른다. 찔리지 않는 대신, 조금 춥다.

무의미한 충돌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것도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1964년 조류학자 제럼 브라운은 '경제적 방어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동물은 영역을 지켜서 얻는 이익이 지키는 비용보다 클 때만 그 영역을 방어한다. 먹이가 너무 흩어져 있거나 침입자가 너무 많아서 방어에 드는 에너지가 얻는 것보다 크면, 동물은 영역을 포기하고 떠돌거나 무리를 짓는다.

현대인의 '손절'도 이 계산의 결과다. 이 관계를 지키려고 싸우는 비용이, 이 관계에서 얻는 것보다 크다는 판단.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에너지가 유한하다는 걸 깨달은 동물의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문제는 그 계산이 너무 정확해질 때, 계산되지 않는 것들을 잃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3. 새로운 권위, 새로운 기준

자신이 루틴을 세우고, 자신이 법이 되고, 자신이 자신의 판사가 되어 살아갈 때.

'자율(autonomy)'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아우토스(자기)'와 '노모스(법)'의 결합이다. 말 그대로 '스스로에게 법을 주는 것'. 칸트는 1785년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이것을 인간 존엄의 근거로 삼았다. 남이 정해 준 법을 따르는 것은 '타율'이고, 타율적인 존재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진정으로 도덕적이라 할 수 없다. 스스로 이성을 통해 법을 세우고 그 법을 따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롭다.

한 세기 뒤 니체는 이를 더 급진적으로 밀고 나갔다. 그는 1882년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고 썼다. 이건 무신론 선언이라기보다 하나의 진단이었다. 서양 사회의 가치를 떠받치던 최종 근거가 무너졌다는 것. 그러면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제 누가 가치를 정하는가? 니체의 답은, 우리 자신이 가치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자등명이 니체와 만나는 지점이 여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영토는 단단해지고, 마음의 원료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게 된다.

며칠씩 침대에만 있으면 기분이 다운되는 것처럼, 식단을 하다 야식을 먹었을 때 죄책감이 드는 것처럼, 나 자신의 루틴을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 벌을 주고, 지키면 득이 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이 습관에서 나온다고 했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로워지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용감해진다. 그리스어로 '헥시스(hexis)', 몸에 밴 상태. 처음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지만, 반복되면 제2의 본성이 된다. 윌리엄 제임스는 습관을 '사회의 거대한 플라이휠'이라고 불렀다. 한번 돌기 시작하면 관성으로 계속 도는 무거운 바퀴.

루틴이 나를 지탱한다는 감각은 이 플라이휠의 감각이다. 처음엔 내가 밀어야 돌지만, 나중엔 그것이 나를 민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림자가 있다.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2010)에서 현대인이 '성과주체'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과거의 규율사회에서는 외부 권력이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성과사회에서는 아무도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할 수 있다'는 '해서는 안 된다'보다 훨씬 무자비하다.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과 노예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면서 그것을 자유라고 믿는다. 그 결과가 우울증과 소진이라는 것이 한병철의 진단이다.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1975)에서 분석한 판옵티콘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감시자가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죄수는 언제 감시당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결국 감시자가 필요 없어진다. 감시는 내면화된다.

그러니까 '자신이 자신의 판사가 된다'는 건 양날의 검이다. 해방일 수도 있지만, 가장 가혹한 감옥일 수도 있다. 야식을 먹었을 때 드는 죄책감이 나를 지키는 울타리인지, 나를 가두는 철창인지는 같은 감정 안에서 잘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좋은 판사의 조건이 엄격함만이 아니라 관용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에게 법을 주는 사람은 자기를 사면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 법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이지, 내가 내 법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니까.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내 위치가 발각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 힘이 모이기 전까지는 드러내지 않는 게 이롭다.

동양에는 이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 여럿 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누그러뜨려 먼지와 함께한다. 둘 다 같은 이야기를 한다. 아직 영토가 작을 때 깃발을 크게 세우면 공격받는다. 아직 단단하지 않은 의미를 너무 일찍 드러내면 남들의 평가에 휘둘려 흔들린다. 씨앗은 땅속에서 자란다.

루틴이 쌓여 생긴 자신감을 내공이라 하고, 그것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것을 카리스마라고 하는 것 같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그리스어 '카리스(charis)', 즉 '은총'이나 '선물'에서 왔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신이 내려 준 특별한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베버는 이 단어를 가져와 사회학 개념으로 만들었는데, 그에게 카리스마는 본질적으로 '비일상적인' 것이었다. 일상의 규칙을 깨고 나타나는 비범함. 그리고 베버는 카리스마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일상화'된다고 보았다. 예언자가 죽으면 교회가 생기고, 혁명가가 죽으면 관료제가 생긴다. 비범함은 결국 제도로 굳는다.

그런데 이 글에서 말하는 카리스마는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일상이 쌓여서 비범함이 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양을 읽고, 같은 거리를 걷는 사람에게서 어느 날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진다. 베버의 카리스마가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이라면, 이 카리스마는 땅에서 자라난 열매다. 나는 우리 시대의 카리스마가 이쪽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사라진 시대의 은총은, 스스로 길러 낼 수밖에 없다.

'내공'이라는 말이 무협지에서 왔다는 것도 흥미롭다. 외공이 눈에 보이는 기술이라면, 내공은 오랜 수련으로 몸 안에 쌓인 보이지 않는 힘이다. 고수는 초식을 쓰지 않아도 고수라는 게 느껴진다. 은은하다는 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새어 나온다는 뜻이다.

4. 다시 동물

우린 동물이기 때문에, 계속 움직이려는 에너지가 생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고 썼다. 그는 이 애씀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불렀고, 그것이 각 사물의 본질 그 자체라고 했다. 돌은 돌로 남으려 하고, 나무는 나무로 자라려 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나만의 '영역'을 만드는 데 쓰인다.

20세기 초 독일의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은 '움벨트(Umwelt)'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모든 동물은 같은 물리적 세계에 살지만, 각자가 지각하고 반응할 수 있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자기만의 세계에 산다는 것이다. 그가 든 유명한 예는 진드기다. 진드기의 세계에는 단 세 가지 신호만 존재한다. 포유류의 땀에서 나는 냄새, 체온의 따뜻함, 그리고 털의 감촉. 진드기는 나뭇가지 끝에서 그 냄새가 올 때까지, 때로는 몇 년이고 기다리다가, 냄새가 오면 떨어지고, 따뜻함을 찾아 기어가고, 털이 적은 곳을 찾아 피를 빤다. 진드기에게 숲의 아름다움이나 새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드기의 세계가 아니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서울에 살지만, 각자는 서로 다른 서울에 산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의 서울에는 카페 지도가 그려져 있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의 서울에는 강변 코스가 그려져 있다. 영역이란 결국 나의 움벨트다. 그리고 인간이 진드기와 다른 점은, 우리는 그 움벨트를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새로운 것을 겪을 때마다, 세계에는 이전에 없던 신호가 하나씩 켜진다.

움직이지 않으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고여서 어딘가로 흘러갈 때까지 축적되거나, 썩는다.

『여씨춘추』에는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지도리는 좀먹지 않는다(流水不腐 戶樞不蠹)'는 구절이 있다. 자주 여닫는 문의 경첩에는 벌레가 슬지 않는다. 움직임이 곧 보존이라는 것이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물리학의 법칙을 떠올려 보아도 좋다. 쓰이지 않은 에너지는 어딘가에 남는다. 마음의 에너지도 그렇다. 표현되지 못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고 쌓이다가 엉뚱한 곳으로 터져 나온다. 남의 취향을 비꼬는 댓글로, 이유 없는 짜증으로, 밤늦은 무한 스크롤로. 썩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고인 에너지는 자기 영역을 가꾸는 대신, 남의 영역을 갉아먹는 데 쓰이기 시작한다.

어떤 영역을 만들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어떤 형태로 운영할 것인가.

이건 정원사의 질문이다. 정원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무엇을 심을지 정해야 하고, 무엇을 뽑을지도 정해야 한다. 그리고 정원에는 담장이 필요하지만, 문도 필요하다. 담장만 있는 정원은 감옥이고, 문만 있는 정원은 공터다. 좋은 영역은 경계가 분명하면서도 초대가 가능한 곳이다. '당신의 료이키에 초대해 주세요'라는 말이 아름다운 건 그 때문이다. 영역이 있기에 초대가 가능하고, 초대가 있기에 영역이 의미를 갖는다.

움직이자. 학습하고, 또 체험해서 영토를 가꾸어 보자.

사주에서는 마음의 영토를 이미지화시켜 주기는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결국 자기가 만드는 거다.

사주가 흥미로운 건, 자연의 이미지로 사람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큰 나무, 작은 풀, 바위, 강물, 촛불, 태양. 그 이미지들은 '나는 어떤 땅인가'를 상상하게 해 준다. 하지만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사주가 주는 건 출발점의 지형도일 뿐, 그 위에 무엇을 지을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같은 땅에서도 누군가는 숲을 가꾸고 누군가는 황무지로 둔다. 결국 자기가 만드는 거다.

Ps. 그럼에도 연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연대가 필요하다. 어떤 방법인지를 선택하는 게 골자다. 직관에 닿아 있지 않다면 역사를 공부해야겠다.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게 쉬운 방법이고 원초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그런 연대는 결국 붕괴된다. 불안감으로부터 지탱하려는 연대이기 때문에, 대상이 사라지면 자기들끼리 새로운 적을 찾기 시작한다.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1932년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의 본질을 '친구와 적의 구별'로 정의했다. 집단은 적을 통해 자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날카로웠고, 그래서 위험했다. 슈미트 자신이 이듬해 나치당에 입당했다는 사실은, 적을 통해 결속하는 논리가 어디로 흘러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 논리의 한계를 보여 주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1954년 사회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미국 오클라호마의 한 캠프에서 열한두 살 소년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각 그룹은 곧 이름과 깃발을 갖게 되었고, 경쟁 게임을 시키자 금세 서로를 적대했다. 상대의 깃발을 불태우고 숙소를 습격했다.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게 하는 것만으로는 적대감이 줄지 않았다. 셰리프가 찾은 해법은 '상위 목표'였다. 캠프의 물 공급이 끊기거나 식량을 실은 트럭이 멈춰 서는 것처럼, 두 그룹이 협력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를 주자 적대감이 서서히 녹았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생긴다. 공동의 적은 '저것을 무찌르자'로 사람을 묶고, 상위 목표는 '이것을 해내자'로 사람을 묶는다. 앞의 것은 적이 사라지면 끝나지만, 뒤의 것은 목표를 이룬 뒤에도 '함께 해냈다'는 기억이 남는다.

에밀 뒤르켐은 1893년 『사회분업론』에서 연대를 두 종류로 나눴다.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 기계적 연대는 같음에서 나온다. 같은 신을 믿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결속. 전통 사회의 연대다. 유기적 연대는 다름에서 나온다. 각자가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결속. 심장과 폐와 간이 서로 다르기에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처럼.

이 구분이 이 글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기계적 연대의 시대를 떠났다. 모두가 각자의 영역을 가진 시대에, 같음을 통한 결속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연대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다름을 통한 연대, 서로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연대가 남아 있다. 내 영역에서 자라는 것이 당신의 영역에 없고, 당신의 영역에서 자라는 것이 내 영역에 없기에, 우리는 교환할 수 있다. 초대할 수 있다.

『논어』 자로편에는 '군자는 화합하되 같아지지 않고, 소인은 같아지되 화합하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구절이 있다. 이천오백 년 전의 문장이 지금을 위해 쓰인 것처럼 읽힌다. 같아지지 않으면서 화합하는 것.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남의 영역에 초대받는 것.

앞에서 붓다가 자등명과 법등명을 늘 함께 말했다고 했다. 이제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스스로를 섬으로 삼되, 섬과 섬을 잇는 바다의 법칙을 잊지 말라는 것. 각자의 등불은 각자의 섬을 밝히지만, 멀리서 보면 그 불빛들이 모여 하나의 군도(群島)를 이룬다. 바다 위에 흩어진 섬들은 저마다 떨어져 있지만, 같은 바다 위에 있다.

그러니 영역을 만들자. 단단하게, 그러나 문을 달아서.

그리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기꺼이 말하자.

야레야레 쇼가나이나.. 어서와, 코레가 보쿠노 료이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