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진리에 발붙이고 사나

어떤 진리에 발붙이고 사나

1. 짧은 기호에 담긴 것들

뉴턴이 정립한 역학이라든지, 아인슈타인이 말한 물질과 에너지와 빛의 관계 공식은 간단하다.
복잡하게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게 아니라,
F=ma, E=mc²처럼 딱 깔끔하게 정리된 형태.

세상에서 가장 넓은 이야기를 하는 문장이 세상에서 가장 짧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 내가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이 전부 저 세 글자 안에 들어 있다. 별이 타오르는 것도, 원자력 발전소가 돌아가는 것도 E=mc² 다섯 글자 안에 있다. 긴 설명은 대개 좁은 이야기를 하고, 짧은 기호는 대개 넓은 이야기를 한다.

철학에서도 그런 게 있다. 대표적으로 헤겔의 정-반-합. 간단하다. 하나의 주장이 있고, 거기에 반대가 나오고, 둘이 부딪히면서 더 높은 차원의 무언가가 된다. 재밌는 건 헤겔 본인은 이 '정반합'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는 거다. 피히테 같은 동시대 철학자나 후대 해설자들이 헤겔을 요약하면서 붙인 꼬리표에 가깝다. 헤겔의 책은 어렵기로 악명높고, 사람들은 그걸 세 글자로 줄여서 소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공식 자체가 '말로 다 풀 수 없는 것을 기호로 줄이는 일'의 좋은 예다.

동양에서는 태극으로 표현했다. 동그라미 안에 흑백이 공존하는 그것. 태극도를 자세히 보면 검은 물고기 안에 흰 점이, 흰 물고기 안에 검은 점이 박혀 있다. 이 점이 핵심이다. 흑과 백이 반반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가장 검은 곳에 이미 흰 것의 씨앗이 있다. 해가 가장 긴 하지부터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이 점 하나는 나중에 다시 꺼낼 거다.

각 학문은 저마다의 진리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진리를 정립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뭔가 지침을 받은 것이다.
"세상에 그걸 알려라" 하고.
천재들은 그냥 그런 게 보이는구나~ 머리라는 장독대가 깨지지도 않고, 연결도 잘 되고, 생각한 걸 정리도 잘하고, 본 걸 입증할 작업물도 내니까.


낮이 있으면 밤도 있고, 찬성이 있으면 반대도 있고. 그러면서 사과는 익어 떨어지고, 티격태격하면서 성숙해지고.

진리를 기호로 짧게 표현한 이유는 이거 아닐까?
나름 대중성을 갖추려고 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너무 자기들만의 직관이다. 게다가 진리긴 한데 말로 다 풀자니 너무 많아. 할말하않… 하고 천재의 머리에서 기호가 띡! 나오는 거지.

기호는 압축 파일 같은 거다. 천재는 자기 머릿속의 거대한 풍경을 .zip으로 묶어서 세상에 던진다. 받는 사람은 그걸 풀어야 한다. 그런데 압축을 풀려면 압축한 사람과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같은 E=mc²를 보고도 누구는 우주를 보고, 누구는 시험 문제를 본다. 압축을 풀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자연스럽게 '우리만 아는 것'이 생긴다. 그렇게 생긴 게 밀교다.

⸻

2. 밀교도들의 비밀 — 피타고라스 학파 이야기

그 당연한 걸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으려던 밀교도들은 좀 귀엽기도 하다. 그런데 그 귀여움 뒤에는 꽤 섬뜩한 이야기도 하나 있다.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는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에 학파를 세웠다. 수학 교실이라기보다 수도원에 가까운 곳이었다. 입문하면 몇 년간 침묵해야 했고, 콩을 먹지 않는 따위의 이상한 계율을 지켰고, 무엇보다 학파에서 배운 것을 밖에 발설하면 안 됐다. 그들이 지키던 비밀의 핵심은 하나였다. "만물은 넘버다."

이건 그냥 신비주의가 아니었다. 피타고라스는 현의 길이를 2:1로 나누면 한 옥타브, 3:2로 나누면 완전5도 화음이 난다는 걸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귀에 아름답게 들리는 소리가 알고 보니 간단한 정수의 비율이었던 거다. 그렇다면 별의 움직임도, 영혼도, 세계의 질서도 결국 정수와 그 비율로 설명되지 않을까? 인류가 처음으로 "세계는 수학으로 쓰여 있다"고 믿은 순간이었고, 그 믿음은 2천 년 뒤 뉴턴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피타고라스 학파의 진리는 틀린 게 아니라, 아주 깊이 옳았다.

문제는 그들이 진리를 '정수의 비율'에 너무 꽉 묶어 뒀다는 거다. 그리고 하필 그들 자신의 이름이 붙은 정리가 그걸 깼다.

한 변이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을 생각해보자.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르면 대각선의 길이는 √2다. 그런데 √2는 어떤 정수 두 개의 비율로도 나타낼 수 없다. 증명도 어렵지 않다. √2 = p/q라고 두고, 이 분수가 더 이상 약분되지 않는다고 하자. 양변을 제곱하면 p² = 2q², 그러니까 p²은 짝수고, 따라서 p도 짝수다. p = 2k로 두면 4k² = 2q², 즉 q² = 2k²이니 q도 짝수다. 약분이 안 된다고 했는데 둘 다 짝수라니, 모순이다. 따라서 √2는 분수가 아니다.

정사각형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완벽한 도형 안에, 그들의 세계관으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수가 숨어 있었던 거다.

전설에 따르면 이 사실을 알아낸, 혹은 밖으로 발설한 사람은 학파의 일원 히파소스였다. 그리고 그는 바다에서 익사했다. 신이 벌을 내렸다는 얘기도 있고, 동료들이 배에서 던졌다는 얘기도 있다. 역사적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후대의 기록들이 서로 다르고, 과장이 섞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2천 년 넘게 살아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서 너무나 익숙한 무언가를 봤기 때문이다.

세계관이 깨지면, 사람은 세계관을 고치는 대신 그걸 깬 사람을 없애고 싶어진다.

√2에게는 잘못이 없다. 히파소스에게도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만물은 정수의 비'라는 법칙을 너무 좁게, 너무 단단하게 세운 쪽이다. 하지만 자기 세계가 무너지는 걸 느끼는 순간,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깨진 건 세계관인데 아픈 건 나고, 그러니 탓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럼 역사는 결국 어떻게 됐나? 수학은 √2를 없애지 않았다. 대신 '수'라는 개념을 넓혔다. 유리수 바깥에 무리수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둘을 합쳐 실수라는 더 큰 집을 지었다. 나중에는 허수까지 들여 복소수라는 더 큰 집을 지었다. 피타고라스의 "만물은 수다"는 폐기되지 않았다. 오히려 '수'가 넓어지면서 더 참이 되었다. 물리학은 오늘도 세계를 수로 쓰고 있으니까.

기억해두자. 진리가 깨졌을 때 좋은 결말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집을 넓히는 것'이었다.

⸻

3. 주화입마 — 내 법칙이 깨질 때

책들을 이것저것 읽다 보면 "어? 나도 뭔가 보이는 것 같은데…" 할 때가 있다. 이게 주화입마다.

무협지에서 주화입마는 내공을 급하게, 혹은 잘못된 방식으로 쌓다가 기가 역류해 몸이 망가지는 걸 말한다. 재밌는 건 주화입마는 초보자에게 오지 않는다는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역류할 내공 자체가 없다. 어느 정도 쌓은 사람, 뭔가 보이기 시작한 사람한테 온다. 독서도 똑같다. 책 세 권 읽었을 때가 제일 위험하다. 뭔가 연결되는 느낌은 드는데, 그 연결이 얼마나 약한지는 아직 모르는 시기.

내 법칙을 세웠다! 했는데, 안 맞는 것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잡다한 것들이 생각 속에 끼기 시작한다.
처음엔 예외로 치고 넘어간다. "이건 특수한 경우니까." 그런데 예외가 두 개, 세 개, 열 개가 되면 예외를 설명할 보조 법칙이 필요해지고, 보조 법칙을 설명할 보조의 보조가 필요해진다. 천동설이 행성의 역행 운동을 설명하려고 원 위에 원을 계속 얹었던 것처럼. 법칙은 점점 누더기가 된다.
그러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깨진다.

그 대상이 사람이 되면?
자기 세상이 깨진 걸 그 사람 탓으로 돌려서 방어하려 하기도 한다. 히파소스를 바다에 던지는 거다.
물론 그 역시 진리로 가는 길 중에 겪어야 하는 일이겠지만… 참 고통스럽다.

《데미안》은 거기서 알을 깬 얘기고, 《호밀밭의 파수꾼》은 깨지 못한 경우를 다룬 듯하다.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찢어지다가 결국 둘 다를 품는 쪽으로 간다. 헤세가 그 과정을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투쟁에 비유한 건 유명하다. 알은 안전하지만, 나가려면 깨야 한다. 반면 홀든 콜필드는 세상을 온통 '가짜'라고 부른다. 어른들도, 학교도, 영화도 전부 가짜다. 그가 지키고 싶은 건 순수한 아이들의 세계인데, 그 세계는 이미 금이 가고 있다. 그리고 홀든은 금이 간 이유를 계속 바깥에서 찾는다. 알이 깨지는 고통을 바깥 탓으로 돌리는 한, 알에서 나올 수 없다.

요즘은 알고리즘 덕분일까, 저마다의 진리를 쌓기 편해졌다.
그만큼 깨질 일도 많아졌다.
예전엔 국룰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글룰(Global Rule)을 알게 되었고,
사람마다 다르니까 자기한테 맞는 걸 따라가다가, 국룰에 꺾이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걸 따라가야 하고, 무리별로 룰이 있고, 심지어 개인 간에도.

알고리즘은 내 법칙을 강화해주는 기계다. 내가 한 번 끄덕인 영상 뒤에는 끄덕일 영상이 줄지어 온다. 예외는 피드에서 사라지고, 내 법칙은 점점 완벽해 보인다. 천동설 학자들에게 원 위의 원이 필요 없는 세상이다. 알고리즘이 안 맞는 행성을 하늘에서 알아서 치워주니까. 그런데 현실은 알고리즘이 아니라서, 피드 밖으로 한 발만 나가면 치워뒀던 예외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쌓기 쉬워진 만큼, 무너질 때도 한꺼번에 무너진다.

그러니까 전체를 안 보고 하나의 플레이에 과몰입하다가 삐끗하면 이제 난리가 나는 거다.
책상 쾅 치고, 헤드셋 던지고, 모니터 뿌시는 거다.
게임을 해본 사람은 안다. 한 판 망쳤다고 모니터를 부수는 사람은 그 한 판이 게임의 전부라고 느끼는 사람이다. 시즌 전체를 보는 사람은, 아니 그냥 "이건 게임이지" 하고 의자를 한 번 뒤로 젖힐 줄 아는 사람은 헤드셋을 던지지 않는다.

진리라는 건 길이 여러 갈래라도 보면 누구나 "이건 진리다" 하고 알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만든 진리를 진리라고 믿고 과몰입하면 이상한 꼴이 되어버린다. 부분적으로 자명한 부분도 있으니까 사이비에 빠진 사람도 있는 거겠지?
사이비가 무서운 건 전부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절반쯤 맞아서다. 앞의 말이 맞으니 뒤의 말도 믿게 된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2 앞에서 그렇게 완고했던 것도, 그들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이다.

⸻

4. 기둥과 눈높이 — 뉴턴은 틀렸나?

그래서 옛날 철학에서 이치의 기둥을 박아두면 좋다.
그러면 크게 흔들려도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다.

고집이랑은 좀 다르다.
이건 '눈높이'라고 표현해야 맞겠다.
산도 높은 곳에 있으면 더 넓게 보는 거니까.
고집은 시야를 닫아두는 거고, 눈이 높은 건 수용 범위가 넓은 것.
세계관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로만 하면 모호하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진리 깨짐'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글 첫머리의 두 사람, 뉴턴과 아인슈타인이다.

뉴턴의 역학은 200년 넘게 완벽했다. 대포알의 궤적도, 행성의 궤도도, 밀물과 썰물도 전부 맞췄다. 1846년에는 천왕성 궤도의 미세한 어긋남을 뉴턴 역학으로 계산해 아직 아무도 본 적 없는 행성의 위치를 예측했고, 망원경을 그쪽으로 돌렸더니 정말 해왕성이 있었다. 이 정도면 진리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데 작은 예외가 하나 남아 있었다. 수성의 궤도다. 수성이 태양에 가장 가까워지는 지점은 조금씩 돌아가는데, 뉴턴 역학으로 계산한 값과 실제 관측값이 100년에 약 43초각만큼 어긋났다. 1초각은 1도의 3,600분의 1이다. 거의 아무것도 아닌 오차다. 과학자들은 해왕성 때처럼 생각했다. 수성 안쪽에 아직 못 찾은 행성이 있을 거다. 이름까지 지어줬다. 불칸.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찾았지만, 불칸은 없었다.

1915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그 43초각을 정확히 계산해냈다. 뉴턴이 틀린 거였다.

그런데 정말 '틀린' 걸까? 여기서 이야기가 재밌어진다. 오늘날에도 로켓을 쏘고 다리를 설계할 때는 뉴턴 역학을 쓴다. 상대성이론의 식에 '속도가 빛보다 한참 느리고, 중력이 아주 강하지 않다'는 조건을 넣으면 식이 정리되면서 뉴턴의 식이 그대로 튀어나온다. 뉴턴 역학은 버려진 게 아니라, 상대성이론이라는 더 큰 지도 안의 한 구역이 된 거다. 동네 지도가 틀린 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걸 반영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작은 지도였던 것뿐이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이런 과정을 '패러다임 전환'이라 불렀다. 과학자들은 평소엔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퍼즐을 푼다. 그러다 안 풀리는 예외, 쿤의 말로는 '변칙 사례'가 쌓이면 위기가 오고, 결국 세계를 보는 틀 자체가 바뀐다. 쿤은 이 전환이 지식의 단순한 누적이 아니라고 했다. 오리로 보이던 그림이 갑자기 토끼로 보이는 것처럼, 같은 데이터를 보는데 전혀 다른 세계가 보이는 일이라고.

쿤의 이야기는 우리 개인의 주화입마와 정확히 겹친다. 내 법칙에 안 맞는 것들이 쌓인다(변칙 사례). 처음엔 보조 법칙으로 막는다(불칸을 찾는다). 그러다 위기가 온다(세계관이 깨진다). 여기서 갈림길이 있다. 히파소스를 바다에 던지거나, 불칸을 영원히 찾아 헤매거나. 아니면 더 큰 지도를 그리거나.

헤겔로 돌아가 보자. 정-반-합이라는 요약에서 정말 중요한 건 '합'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가리키는 헤겔의 단어다. 독일어로 아우프헤벤(Aufheben), 우리말로는 흔히 '지양'이라 옮긴다. 이 단어는 신기하게도 서로 반대되는 뜻을 한꺼번에 품고 있다. 폐기한다. 보존한다. 들어 올린다. 헤겔은 이 모순을 오히려 반겼다. 진리가 발전하는 방식이 딱 그렇다는 거다. 낡은 진리는 버려지는데, 동시에 보존되고, 더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진다.

√2 때문에 '수'의 개념이 넓어진 것. 수성 때문에 뉴턴 역학이 상대성이론의 특수한 경우가 된 것. 둘 다 아우프헤벤이다. 옛 진리는 틀렸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새 진리의 방 한 칸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눈높이'는 이거다. 산 아래에서 보던 풍경이 거짓이었던 게 아니다. 산 위에 올라가도 아래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 보이고, 그게 더 넓은 풍경의 일부라는 것까지 보인다. 고집은 산 아래 풍경이 세계의 전부라고 우기는 거고, 눈이 높다는 건 올라온 뒤에도 아래를 부정하지 않는 거다.

여기서 미뤄둔 태극의 점을 꺼내자. 검은 물고기 안에 박힌 흰 점. 내 세계관 안에 나와 반대되는 것의 씨앗을 하나 박아두는 것. 이게 기둥을 박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옳다"는 기둥이 아니라, "나는 틀릴 수 있고, 틀렸을 때 나는 더 커질 것이다"라는 기둥. 흔들리지 않으려는 기둥이 아니라, 흔들려도 돌아오게 하는 기둥이다. 오뚝이의 무게중심처럼.

⸻

5. 나의 진리는 무엇인가?

나는 아직 내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예전엔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알의 껍데기였던 거다.

그때 내가 믿었던 건 "나는 옳고, 기세가 전부다!"였다.
그래서 모 아니면 도! 이게 모토였는데,
지금은 시야 차이가 크다.

모 아니면 도 → 그런 가능성도 있군.

이 두 문장 사이의 거리가 내가 지금까지 올라온 산의 높이인 것 같다. 돌아보면 '모 아니면 도'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세가 필요한 순간은 분명히 있었고, 그 기세 덕분에 저지를 수 있었던 일들도 있었다. 다만 그건 윷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맞는 말이었다. 인생은 윷 한 번 던지고 끝나는 게임이 아니었고, 개도 걸도 판을 움직인다는 걸, 가끔은 도가 나와서 오히려 상대 말을 잡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그런 가능성도 있군'은 '모 아니면 도'를 버린 게 아니다. 그걸 품은 거다. 기세가 필요할 땐 여전히 기세를 낸다. 다만 그게 전부라고 믿지 않을 뿐이다. 나 혼자 해보는 작은 아우프헤벤이다.

눈은 어떻게 높이는 건지 아직 모르겠다.
고진감래처럼 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단 것이 쓴 것 '뒤에 오는' 게 아니라 쓴 걸 끝까지 삼킨 사람의 혀가 바뀌는 게 아닐까 하는 거다. 세계관이 깨지는 고통을 남 탓으로 뱉어내지 않고 끝까지 삼켜본 사람만, 다음 풍경이 보이는 높이에 올라가 있는 것 아닐까.

⸻

6. 직관이 진리와 통할 때

직관이 진리와 통하는 느낌이 오는 경우도 있다.
누가 조언을 구하러 올 때.
상대의 문제에 있어서는 넓은 시야가 생긴다 ㅎㅎ
근데 내 문제는 안 보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심리학자 이고르 그로스만과 이선 크로스는 이 현상에 '솔로몬의 역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혜의 대명사 솔로몬 왕이 남의 송사는 기가 막히게 판결하면서 정작 자기 말년은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따온 이름이다. 그들의 2014년 연구에서 사람들은 자기 연인이 바람을 피운 상황을 상상할 때보다 친구의 연인이 바람을 피운 상황을 상상할 때 훨씬 지혜롭게 추론했다. 다른 관점을 고려하고,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타협점을 찾았다. 흥미로운 건 해법이다. 자기 문제를 3인칭으로,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대신 "그는 어떻게 해야 하지?"로 생각하게 하자 그 격차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조언할 때 시야가 넓어지는 건 내가 갑자기 현명해져서가 아니다. 그 문제 안에 내가 없어서다. 내 세계관이 깨질 위험이 없으니 여유롭게 산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거다. 눈높이란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거리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도, 나는 이걸 남들이 어떻게 볼지 잘 모르겠다.
"난 객관적이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가장 주관적인 사람일지도.

이것도 연구가 있다. 심리학자 에밀리 프로닌과 동료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남들이 편향에 휘둘린다는 건 쉽게 인정하면서 자기는 상대적으로 덜 편향됐다고 평가한다. 이름하여 '편향 맹점'. 더 얄궂은 건 편향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도 "그래, 사람들은 다 그렇지. 근데 나는 좀 덜한 편이고" 하고 넘어간다는 거다. 그러니 "난 객관적이다"라는 말은 객관성의 증거가 아니라, 맹점이 가장 깊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사람의 생각이란 건,
아침과 점심이 다르고,
10년 뒤엔 꽤 많이 달라지는 거니까.
객관적일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강물도 흐르고, 발을 담그는 나도 흐르니까. 10년 전의 나에게 이 글을 보여주면 아마 이랬을 거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모야, 도야?"

잘 변하지 않는 사람도 간혹 있다.
로마 시절 건물을 그대로 쓰는 이탈리아 같은 사람이.

그런데 로마의 판테온을 생각해보면, '안 변한다'는 게 꼭 그런 뜻만은 아닌 것 같다. 판테온은 2세기 초에 지어졌는데, 1,900년이 지난 지금도 지붕이 멀쩡히 서 있다. 철근 없이 콘크리트로 부은 그 거대한 돔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큰 무근 콘크리트 돔이다. 하지만 판테온이 살아남은 이유는 튼튼해서만이 아니다. 7세기 초, 로마의 신들을 모시던 신전이 기독교 성당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계속 누군가 쓰고 돌보는 건물로 남았다. 같은 시대의 다른 신전들이 버려지고 돌이 뜯겨 나가는 동안.

그러니까 판테온은 안 변한 게 아니다. 구조는 지키고 쓰임을 바꿨다. 기둥은 그대로 두고 안에 모시는 것을 바꿨다. 잘 안 변하는 사람들, 흔들려도 중심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가진 게 어쩌면 이런 것 아닐까. 고집처럼 보이지만 고집이 아니라, 튼튼한 돔 아래에 새로운 것을 들일 줄 아는 것.

판테온 돔 한가운데에는 지름 9미터 가까운 구멍이 뚫려 있다. 오쿨루스, 이 건물의 유일한 창이다. 비가 오면 비가 그대로 들어온다. 로마 사람들은 그 구멍을 막는 대신 바닥을 살짝 볼록하게 만들고 배수 구멍을 뚫었다. 가장 단단한 지붕의 한가운데에, 하늘을 향해 열린 구멍 하나. 나는 그게 태극의 점 같다.

나의 진리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 찾게 된다면, 구멍 뚫린 돔 같은 모양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