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수

손민수

손민수 당하는 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내 행동, 옷차림, 말투를 따라하면
뭔가 찝찝하고 불쾌하다.

이상한 건, 불쾌함의 크기가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게 유명인이었다면,
과연 똑같이 기분이 나빴을까?

아마 아니었을 거다.
오히려 우쭐했겠지.
"나한테서 가져갔다"가 아니라
"나랑 취향이 통하네"로 번역됐을 거다.

같은 행위인데 번역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문제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가 놓인 거리(距離)에 있다.

나는 어떨 때 누군가를 따라하지?

나보다 나은 무언가를 따라하지,
못난 걸 따라하진 않는다.

이건 당연한 얘기 같지만
사실 꽤 중요한 전제다.
모방은 언제나 위를 향한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하는 사람은
나를 자기보다 위에 두고 있다는 뜻이 된다.

칭찬이다.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쁠까?

내가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쌓아온 나만의 요소들을
그 사람이 나를 보고 그대로 베낀다.
내 자아는 그걸 '강탈 행위'로 받아들이고,
내면에서 투쟁 본능이 켜진다.

그런데 여기서 걸린다.
그렇다고 나만의 스타일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어딘가에서 보고 배운 걸 섞은 거니까.

그럼 내가 참고했던 사람들은
나한테 기분 나빠해야 하나?

말이 안 된다.
내가 강탈당했다고 느끼는 그 '고유함'은
애초에 내가 강탈해온 것들의 조합이다.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없는데도
소유권을 침해당한 감각만은 선명하다.

이 모순이 이 글의 진짜 질문이다.

지라르: 욕망은 원래 남의 것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한 가지 불편한 주장을 한다.

우리는 대상을 직접 욕망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것을 욕망하는 걸 보고 욕망한다.

욕망은 나 → 대상의 직선이 아니라
나 → 모델 → 대상의 삼각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걸 '모방 욕망'이라고 불렀다.

내가 좋아한다고 믿는 신발, 말투, 태도는
대부분 누군가가 그것을 멋있게 소화하는 걸
어디선가 봤기 때문에 좋아진 것이다.
'낭만적 거짓'은 이 중개자를 지우고
"이건 순수한 내 취향이야"라고 믿는 상태를 말한다.
중요한 건 지라르의 다음 구분이다.

그는 모방 관계를 두 종류로 나눈다.

외적 매개.
모델이 나와 다른 세계에 산다.
연예인, 소설 속 인물, 죽은 작가, 업계의 거장.
그들을 따라해도 나는 그들과 부딪히지 않는다.
같은 자리를 놓고 경쟁할 일이 없으니까.
이때 모방은 존경이고, 학습이고, 계보가 된다.

내적 매개.
모델이 나와 같은 세계에 산다.
같은 회사, 같은 모임, 같은 커뮤니티.
이 경우 모델과 나는 같은 자리를 두고 겹친다.
그래서 모델은 순식간에 장애물로 변한다.

지라르는 이 상태를 '모델-장애물'이라고 불렀다.
같은 사람이 동시에 등대이자 걸림돌인 상태.

이 구분 하나로
"유명인이 따라했으면 안 기분 나빴을까?"라는 내 질문은
거의 다 풀린다.

유명인이 나를 참고하면
그건 외적 매개다. 거리가 멀어서 경쟁이 성립하지 않는다.
옆자리 사람이 나를 참고하면
그건 내적 매개다. 거리가 가까워서 경쟁이 성립한다.

불쾌함의 크기는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베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 자리에 서 있느냐에 비례한다.

불쾌함은 나의 도량이 좁아서가 아니라
거리 측정기가 정확해서 울리는 알람에 가깝다.

아우라가 깎이는 감각

여기에 하나를 더 얹고 싶다.

발터 벤야민은 복제 기술이 예술 작품에서
'아우라'를 빼앗는다고 봤다.
아우라는 원본이 지금 여기에 단 한 번 존재한다는 감각이다.
복제본이 늘어날수록
원본이 특별해서 생기던 후광이 옅어진다.

사람에게도 비슷한 게 있다.

내 스타일이 '나만의 것'일 때
그건 나를 설명하는 압축 파일이었다.
저 사람을 떠올리면 저 셔츠, 저 말버릇, 저 반응 속도.
사람들이 나를 식별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같은 공간에 복제본이 생기면
그 지름길이 더 이상 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정보량이 줄어든다.
나를 설명하던 기호가 나를 덜 설명하게 된다.

'강탈당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실제로 빼앗긴 건 물건이 아니라
나를 구별해주던 신호의 해상도다.

그런데 왜 사랑하는 사람이 닮아가는 건 사랑스러울까

기분 나쁜 이유를 설명했으니
안 나쁜 경우도 설명해야 논리가 닫힌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 말투가 닮고,
제스처가 닮아가는 건 참 사랑스럽다.
심지어 자랑하고 싶다.

같은 모방인데 정반대의 감정이 나온다.
차이는 뭘까.

내가 보기엔 모방이 무엇의 신호로 읽히느냐의 문제다.

경쟁 관계에서 모방은 소유권 주장이다.
"나도 저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친밀한 관계에서 모방은 소속의 신호다.
"나는 너와 같은 편이다"라는 표시로 읽힌다.

심리학에서는 친한 사이일수록 말투와 몸짓이 자동으로 수렴하는 현상이 오래 보고돼왔다.
닮아가는 건 애초에 애착의 부산물이지
전략적 선택이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더 있다.

연인 사이에는 '내 자리'가 하나밖에 없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나를 닮아도
내가 그 사람의 연인이라는 자리는 위협받지 않는다.
겹쳐도 밀려나지 않는 관계.

반대로 사회적 관계에서는
'저 사람 스타일 좋다'는 평판의 자리가 대체로 하나다.
겹치면 밀려난다.

그러니까 문제는 모방이 아니라 희소성이다.
자리가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면 모방은 사랑이 되고,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면 모방은 침입이 된다.

그래서 남는 결론

즉, 상대는 내 요소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고,
나는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건 아닐까?

이게 이 글에서 내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문장이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인정은 아무한테서나 받으면 기쁜 게 아니다.
내가 인정할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서 와야 기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칭찬을 받고도 그 칭찬의 출처를 먼저 검열한다.

내가 불쾌했던 건 베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값을 쳐주지 않는 사람에게서
값비싼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받고 싶지 않은 계좌에서 입금이 들어온 셈이다.

이건 상대의 문제라기보다 내 등급표의 문제다.
그리고 그 등급표는 대체로 근거가 부실하다.

2. 구강기적 결핍

0~1세 때 결핍이 있었음을 깨달은 건
내 흡연 습관과 물 마시는 습관을 관찰하면서였다.
특히 대화할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담배를 급하게 피우고,
말을 많이 했다고 느끼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관찰의 정확도는 꽤 높다고 생각한다.
'급하게'와 '벌컥벌컥'이라는 부사가 핵심이다.
니코틴이 필요한 게 아니라
빠는 동작 자체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갈증이 아니라 삼키는 동작 자체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입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순간들.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감정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입'을 사용하는 습관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연년생 동생이 있었던 것도 영향을 줬겠지.

다만, 원인 서사는 증명되지 않는다

여기서 한 번 제동을 걸고 싶다.

프로이트의 구강기 이론은 직관적으로 잘 들어맞는다.
입으로 세계를 만나던 시기에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입을 통한 만족에 집착한다는 설명.

그런데 이 설명에는 검증 불가능이라는 큰 구멍이 있다.

인간은 대체로 만 3세 이전의 일화 기억을 형성하지 못한다.
기억을 시간과 장소에 묶어 저장하는 해마가
그 시기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아기 기억상실'이라고 부른다.

즉 나는 0~1세의 나를 기억할 수 없다.
기억할 수 없는 시기를 근거로
현재의 습관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설명은 발견이 아니라 구성이다.
내가 지금 가진 증상을 놓고
거꾸로 그럴듯한 과거를 지어낸 것에 가깝다.

이걸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안 그러면 "나는 0세에 이미 이렇게 정해졌다"는
아주 편안하고 아주 무력한 결론에 도착하게 되니까.

더 쓸모 있는 설명: 위니컷의 이행 대상

같은 현상을 다른 각도로 보는 이론이 있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였던 도널드 위니컷은
아이가 담요나 인형 같은 물건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걸 관찰했다.

그는 이걸 병리로 보지 않았다.
'이행 대상'이라고 불렀다.

엄마가 항상 곁에 있어주던 세계에서
혼자 있어야 하는 세계로 건너가는 동안,
아이는 그 사이를 이어줄 중간 물건을 만든다.
담요는 엄마의 대리물이자
혼자 있는 능력을 연습하는 도구다.

위니컷은 또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개념을 썼다.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적당히 실패하는 엄마가 아이를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좌절이 없으면 아이는 혼자 있는 법을 배울 이유가 없으니까.

이 틀로 담배를 다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

담배는 결핍의 증거가 아니라
결핍을 혼자 감당하려고 내가 만들어낸 도구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3분 만에 혼자 안정으로 복귀하는 기술.
말을 많이 한 뒤 밀려오는 노출감을
물 한 컵으로 혼자 닫아버리는 기술.

이건 망가진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
혼자서도 버티려고 꽤 정교하게 설계한 시스템이다.
문제는 그 시스템이 효율이 너무 좋아서
다른 방법을 배울 필요를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원인론에서 기능론으로

프로이트와 갈라선 알프레트 아들러는
원인이 아니라 목적을 봐야 한다고 했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다"가 아니라
"지금 이 행동으로 무엇을 얻고 있는가"를 묻는 방식.

이 질문으로 갈아끼우면 바로 답이 나온다.

담배로 나는 무엇을 얻고 있나.
→ 감정을 말로 꺼내지 않아도 되는 면제권.

물을 벌컥 마시면서 나는 무엇을 얻고 있나.
→ 너무 많이 말했다는 불안을 처리하지 않고 덮을 수 있는 시간.

두 행동 모두 같은 일을 한다.
감정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입을 다른 용도로 점유해버리는 것.

말할 자리에 연기와 물을 채워 넣는다.
입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 한다는 걸 이용한 것이다.

이건 상당히 영리한 방어다.
다만 그 대가로
감정을 언어화하는 근육은 계속 안 쓰이게 된다.

알아차림이 왜 효과가 있는가

중요한 건,
이걸 알아차렸다는 것.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록하고 들여다보면
결국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경험은 신경과학적으로도 설명이 된다.

습관은 신호 → 행동 → 보상의 고리로 굳는다.
반복될수록 이 고리는 대뇌 기저핵으로 내려가
의식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자동 실행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담배를 물고 있다"가 성립한다.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습관은 지워지지 않는다. 덮어씌워질 뿐이다.

학습된 연결은 삭제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신호에 다른 반응을 새로 학습시키면
새 회로가 우선권을 가져갈 뿐이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극심해지면
옛 습관이 놀랄 만큼 정확하게 복귀한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하냐면,
목표를 '끊기'에 두면 실패가 곧 붕괴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목표를 '덮어쓰기'에 두면 재발은 데이터가 된다.
"아, 이 신호에서는 아직 옛 회로가 이긴다."

기록이 힘을 가지는 이유도 같다.
기록은 자동 실행되던 고리 사이에
아주 짧은 관찰의 틈을 낸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0.5초의 간격이 생기고,
그 간격이 선택의 공간이 된다.

의지가 세져서 바뀌는 게 아니다.
자동화가 한 번 끊기기 때문에 바뀌는 거다.

혼자서는 안 되는 이유

습관을 바꾸는 첫걸음은
'이게 건강하지 않다'는 자각이고,
그 자각은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도 얻을 수 있다.
반면교사든, 본받든.

그래서 혼자는 어렵고,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야 바뀔 수 있는 것 같다.

이 문장을 나는 이 글에서 가장 신뢰한다.
그리고 사회학에 이미 비슷한 설명이 있다.

찰스 쿨리는 '거울 자아'라는 개념을 썼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직접 보지 못한다.
타인의 반응을 거울 삼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추론할 뿐이다.

혼자 있으면 거울이 없다.
거울이 없으면 관찰할 대상도 없다.
그래서 자기 관찰은 원리상 고립 속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1장과 2장이 연결된다.

1장에서 나는 나를 따라하는 사람이 불쾌하다고 했다.
그런데 2장에서는 사람들 틈에 있어야 바뀐다고 말한다.

같은 사실의 양면이다.
타인은 내 정체성을 침식하는 위협인 동시에
내 정체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거울이다.

거울을 없애면 침식은 멈추지만
자기 관찰도 함께 멈춘다.

3. 관심을 권력으로 삼아?

"무관심이 제일 무서운 것이다."

이 말의 이면엔 이런 뜻이 숨겨져 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에게 관심을 주지 않겠다."

어딘가 설교에서 많이 들었던 말투.

이 말이 불편한 이유는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절반만 맞기 때문이다.

먼저, 왜 그 위협이 실제로 통하는가

무관심이 무섭다는 건 수사가 아니다.

사회적 배제를 다룬 유명한 실험이 있다.
참가자에게 온라인 공놀이 게임을 시킨다.
처음엔 셋이 사이좋게 공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머지 둘이 참가자를 빼고 저희끼리만 주고받는다.

상대가 실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걸 알려줘도,
심지어 자기가 싫어하는 집단이라고 알려줘도,
참가자들은 일관되게 기분이 나빠졌다.
뇌 영상 연구에서는 이때
신체적 통증을 처리하는 영역이 함께 활성화됐다.

무시당하는 건 비유적으로 아픈 게 아니라
뇌 수준에서 아픔과 같은 배선을 쓴다.

그리고 그게 무기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잘 드는 칼이니까 자꾸 쓰는 것이다.

주목 경제: 희소한 것이 권력이 된다

허버트 사이먼은 1971년에 이런 취지의 말을 남겼다.
정보가 풍요로워지면 정보가 소비하는 것, 즉 주의가 빈곤해진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정확히 그 상태다.
콘텐츠는 무한하고 주의는 유한하다.
그래서 주의는 화폐가 됐다.

화폐가 된 것은 반드시 권력 수단이 된다.

관심을 무기로 쓰는 사람은
이 계산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이다.
가장 희소한 자원을 쥐고,
그걸 조건부로 배급한다.

집에서, 교회에서, 회사에서, 연애에서
이 기술은 놀랄 만큼 똑같이 작동한다.

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 말에 공감할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왜 이 말에 공감할까?

아마도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 예쁨받는다"는
조건부 애정 속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직관은 상담 이론과 정확히 맞물린다.

칼 로저스는 '가치의 조건'이라는 개념을 썼다.
아이는 사랑을 얻기 위해
어떤 모습일 때 사랑받는지를 학습한다.
조용할 때, 성적이 좋을 때, 화내지 않을 때.

그러면 아이는 조건에 맞는 자기만 키우고
조건에서 벗어나는 자기는 잘라낸다.
로저스는 이 절단을 모든 신경증의 뿌리로 봤다.

그리고 여기가 핵심이다.

조건부로 사랑받은 사람은
조건부로 사랑하는 법만 배운다.

자기가 겪은 통제를 그대로 물려준다.
악의라기보다 그게 사랑의 문법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관심을 끊겠다"는 위협은
그들이 아는 유일한 애정 표현일 수도 있다.

헤겔: 무시로 얻은 권력은 왜 결국 비는가

한 층 더 들어가보고 싶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는
잔인한 구조가 하나 있다.

주인은 싸움에서 이겨 노예의 인정을 얻는다.
그런데 그 인정은 주인이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서 온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얻자마자 가치를 잃는다.

인정은 대등한 자에게서 받아야만 값이 매겨진다.

무관심을 무기로 쓰는 사람의 처지가 정확히 이렇다.

그는 관심을 끊겠다고 위협해서 복종을 얻는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반응은
그를 존중해서 나온 게 아니라
그를 두려워해서 나온 것이다.

그가 원한 건 인정이었는데
손에 쥔 건 순응이다.
그래서 아무리 채워 넣어도 허기가 안 가신다.
더 세게 위협하게 되고, 관계는 더 얄팍해진다.

1장의 내 문제와 대칭이라는 게 재미있다.

나는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아 불쾌했다.
그는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순응만 받아 허기졌다.

둘 다 같은 사실의 다른 얼굴이다.
인정은 출처를 고를 수 없고,
고르려 드는 순간 오히려 가난해진다는 것.

무조건적인 것

그래서 신이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처음 경험하면
미쳐버릴 수밖에 없다.

현실에도 그런 사랑은 존재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존재는 감사하게 느껴진다.

로저스가 상담의 조건으로 내건 것도
결국 이것이었다.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나는 당신을 조건 없이 대하겠다는 태도.

그는 이 태도 하나만 충분히 오래 유지되면
사람은 자기가 잘라냈던 부분들을
스스로 회수하기 시작한다고 봤다.

무엇에 무조건성을 두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는 신에게, 누구는 사람에게, 누구는 오래된 개에게 둔다.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구조다.

그 존재가 있다면,
'무관심'이라는 가짜 권력에
어퍼컷을 날릴 수 있다.

가짜 권력인 이유는 분명하다.
그 권력은 내가 관심에 목마르다는 전제 위에서만 작동한다.
공급처가 하나뿐일 때만 독점이 성립한다.
다른 곳에서 이미 충분히 받고 있으면
그 협박은 그냥 소리가 된다.

무관심의 권력을 깨는 건 반격이 아니라
공급처의 다변화다.

다만, 연민이 또 하나의 우월감이 되지 않으려면

멀리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불쌍하다.
그들은 일시적인 지지를 붙들려 애쓰는 중일지도 모른다.
혹은 지지를 아직 못 찾고 있는지도.

--

'불쌍하다'는 말은 위험하다.
내가 방금 벗어났다고 믿는 그 구조를
살짝 다른 방향으로 다시 세우는 말일 수 있어서다.

관심을 무기로 쓰는 사람은 위에서 내려다본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나도 위에서 내려다본다.
높이는 같고 방향만 다르다.

--

그들이 나보다 못한 게 아니라,
내가 우연히 다른 공급처를 먼저 찾았을 뿐이다.

연민은 상대를 낮출 때가 아니라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걸 알 때 생긴다.
그게 아니면 그건 연민이 아니라 안도다.

4. 세 개의 글은 하나의 글이었다

전부 인정의 경제학에 관한 이야기다.

1장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았을 때의 불쾌함.
내가 인정의 출처를 등급 매기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장은 인정을 구하는 대신 입을 막아버리는 습관.
감정을 꺼내 타인의 반응을 받는 대신
혼자 3분 만에 처리하는 자급자족 시스템이었다.

3장은 인정을 배급해서 사람을 조종하는 기술.
그리고 그렇게 얻은 인정이 왜 비는지에 대한 이야기.

세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나는 인정을 누구에게서 받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그 명단은 누가 작성했는가.

내가 값을 쳐주는 사람의 목록,
나를 부러워해도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의 경계,
말해도 되는 감정과 삼켜야 할 감정의 구분.

그 명단은 대체로 내가 쓰지 않았다.
어디선가 물려받은 것이다.
1장에서 내 스타일이 물려받은 것이듯이.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도 분명하다.

지우는 게 아니라 다시 쓰는 것.
습관이 삭제가 아니라 덮어쓰기로만 바뀌듯이,
명단도 찢는 게 아니라 고쳐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혼자서는 안 된다.
거울이 필요하니까.

내가 나를 따라하는 사람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 사람들 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쓴 이유가 여기 있다.

타인은 위협이자 거울이고,
아마 그 둘을 분리할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