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십니까?
1. 자기소개서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알려고 꽤 많은 노력을 한다.
친구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야?"를 물어보는 싸이월드 문답부터, MBTI, 독서, 여행, 그리고 점.
나도 다 해봤다. 사주도 봤고, 책도 읽고.
내가 알 수 있는, 즉 본질적으로 '나'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이상한 이유는 질문하는 사람과 답을 찾아야 하는 대상이 같은 사람이라는 데 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 나는 나를 정면으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울을 찾는다. 친구의 평가, 성격검사, 사주, 남이 써준 나에 대한 문장.
거울은 편하다. 근데 거울에 비친 건 결국 남이 본 나이거나, 내가 보여주기로 한 나다.
2. 나를 묻기 전에, 사람을 물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나를 가장 궁금해했던 시기는 오히려 '나'라는 사람의 패턴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스무 살 언저리. 아직 살아본 게 별로 없어서 데이터가 없던 때.
데이터가 없으니 나를 들여다봐도 나올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궁금해하는 대신 "사람"이 뭔지를 궁금해했다.
사람이라는 종족이 가진 공통의 패턴이 있을 테고, 그 패턴을 찾아서 나에게 적용시키면 나도 설명이 될 거라고 믿었다.
심리학, 철학, 종교. 사람에 대한 보편 이론들을 열심히 주워 담았다.
근데 살다 보니 나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의 패턴이 보이니 그게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은 게 있다.
내가 공부했던 "사람"의 보편 패턴이라는 건 결국 심리학자나 철학자들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보편 이론인 척 써놓은 것이었다.
이건 내 비아냥이 아니다. 당사자들이 먼저 고백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위대한 철학은 저자의 개인적 고백이자 본인도 모르게 쓴 자서전이었다고 썼다.
융은 한술 더 떠서 프로이트와 자신의 차이를 설명하는 글에서 "모든 심리학은, 나의 심리학을 포함해서, 주관적 고백의 성격을 갖는다"고 인정해버렸다.
그러니까 사람에 대한 이론을 공부한다는 건 남의 고백을 읽는 일이었다.
남의 고백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내 고백이 써지지는 않는다.
그건 내가 직접 써야 한다.
3. 첫 번째 단계가 빠져 있다
그러면 내 고백은 어떻게 쓰는가.
우선 나를 알려면 내가 드러나게 되는 경우를 알아야 한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대부분 이 첫 번째 단계가 생략되어 있다.
우리는 나를 드러내지 않고 살도록 배웠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가족 안에서.
드러내지 않는 게 예의고, 능력이고, 어른스러움이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살다 보면 드러날 일이 없으니 볼 일도 없고, 볼 일이 없으니 알 일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유를 모르는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뭔가 비어 있는 느낌.
그건 내가 없어서가 아니라 진짜 내가 드러난 적이 없어서다.
4. 페르소나, 인식하기 쉬운 껍질
그럼 지금 드러나 있는 건 뭔가.
융은 그걸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고대 연극에서 배우가 쓰던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다.
페르소나는 내 의지대로 만든 사회적 껍질이다.
회사에서의 나, 친구들 앞에서의 나, 가족 앞에서의 나.
이건 비교적 인식하기 쉽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가면을 썼다는 걸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문제는 가면이 나쁜 게 아니라 가면이 편하다는 거다.
가면은 잘 작동한다. 사회는 가면에게 보상을 준다. 그러다 보면 가면을 벗을 이유가 없어진다.
가면 아래에 뭐가 있는지는 가면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이 와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정확하게 이름 붙인 철학자가 있다.
5.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카를 야스퍼스는 철학자가 되기 전에 정신과 의사였다.
하이델베르크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보다가 1913년에 『정신병리학 총론』을 썼고, 그다음에야 철학으로 넘어갔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그는 사람이 무너지는 장면을 먼저 보고 나서 사람이 뭔지를 생각한 사람이다.
1919년, 『세계관의 심리학』에서 그는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는 개념을 내놓는다.
그리고 1932년 『철학』에서 그걸 네 가지로 정리한다.
죽음. 고통. 투쟁. 죄.
야스퍼스가 말하는 한계상황의 핵심은 그게 "상황"이 아니라는 데 있다.
보통의 상황은 바뀔 수 있다. 내가 움직이면 상황이 움직인다. 문제가 생기면 풀면 된다.
근데 한계상황은 풀 수 없다.
나는 반드시 죽는다. 사는 동안 반드시 고통받는다. 누군가와 반드시 싸우게 된다.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죄를 짓는다.
이건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 앞에 서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야스퍼스는 이걸 "우리가 부딪혀서 좌초하는 벽"이라고 표현했다.
벽은 넘어가는 게 아니다. 벽에 부딪히는 거다.
그리고 벽에 부딪혀 좌초(Scheitern)하는 그 순간에, 평소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게 드러난다고 그는 말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현존재(Dasein)'로 산다. 그냥 거기 있는 존재. 가면 쓰고, 출근하고, 밥 먹고.
근데 한계상황에서는 '실존(Existenz)'이 드러난다. 어떤 껍질도 작동하지 않을 때 그래도 남아 있는 것.
야스퍼스 본인의 삶이 이 이론의 증거다.
그의 아내 게르트루트는 유대인이었다. 나치는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그는 거부했다.
1937년 교수직을 잃었고, 전쟁 말기에는 부부 모두 강제 이송 명단에 올라 있었다.
1945년 4월로 예정되어 있던 그 이송은 3월 30일 미군이 하이델베르크에 들어오면서 실행되지 않았다.
그는 그 몇 년 동안 자기가 쓴 개념을 자기 몸으로 살았다.
6. 밑바닥을 보고 온다는 것
내 식대로 다시 말하면 이렇다.
한계상황이란 투쟁이나 열렬한 감정,
생명이 걸린 상황이다. 사회적 생명이든 진짜 생명이든.
그때의 나는 가면이 없다.
가면을 벗은 게 아니라 가면이 벗겨진 거다.
그 드러남을 받아들이면, — 나는 받아들인다기보다 '견딘다'에 가깝다고 본다 —
살아남기 위해 위기 상황을 인식하는 걸 잠시 멈추고, 어떤 패턴 체계도 없을 때의 나, 그 자체를 보게 된다.
즉, 나를 알려면 나의 밑바닥을 봐야 한다.
거기서 보게 되는 건 대체로 아름답지 않다.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남 탓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나.
융은 이걸 그림자(Schatten)라고 불렀다. 페르소나가 빛이라면 그림자는 그 빛이 만드는 반대편의 어둠이다.
융의 핵심 주장은 그림자를 없애는 게 아니라 통합하라는 거.
없앨 수도 없다. 빛이 있는 한 그림자는 있다.
밑바닥을 보고 온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 통합이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태극에서 황극으로 가는 것.
태극은 음과 양, 두 개의 극이 맞서 있는 상태다. 빛과 그림자, 착한 나와 비겁한 나.
황극은 그 두 극을 모두 품는 하나의 중심이다.
어느 한쪽이 이기는 게 아니라 둘 다 나라는 걸 인정한 자리.
그 자리에 서면 완전한 시스템이 내면에 장착된다.
속된 말로, 잘 긁히지 않게 된다.
7. 긁히는 것에 대하여
사실 긁히는 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 아닌가.
누가 나를 정확하게 찌르는 말을 할 때.
왜 긁히는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오만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가면이 곧 나라고 믿고 있으면, 가면에 흠집이 나는 게 나에게 흠집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방어적으로 나온다. 외향적인 사람은 공격으로, 내성적인 사람은 피해의식으로.
"쟤가 나를 무시했어." "다들 나를 이렇게 보는구나."
근데 밑바닥을 보고 온 사람은 이미 안다.
"응, 나 비겁한 면 있어. 그거 나도 봤어."
그러니 누가 그걸 찔러도 새로운 정보가 아니다.
긁히지 않는 게 아니라 긁힐 곳이 이미 드러나 있어서 긁어도 표가 안 나는 거다.
그것만 없어지더라도 삶은 편해진다.
8. 공자의 이순(耳順)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자기 인생을 열 살 단위로 정리했다.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에 섰고, 마흔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에 귀가 순해졌고, 일흔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이 중에 나는 예순의 "이순(耳順)"이 방금 말한 그 단계라고 생각한다.
귀가 순해진다. 직역하면 그렇다.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칭찬을 들어도 들뜨지 않고 욕을 들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건 마흔의 "불혹(不惑)"과 다르다. 불혹은 밖에서 오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거다. 아직 방어가 필요한 단계다.
이순은 방어 자체가 필요 없는 단계다. 들어오는 걸 그냥 들어오게 둔다.
주목할 건 순서다.
공자는 이순 앞에 "지천명(知天命)"을 뒀다. 하늘이 나에게 준 명을 아는 것.
내가 뭔지를 먼저 알아야 남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순서가 반대가 아니다.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나를 알게 되는 게 아니라, 나를 알고 나니 남의 말이 그냥 소리가 되는 거다.
9. 1차원의 나, 그리고 그 뒤
여기서 하나 구분하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이런 것에서 위험을 느끼고, 이런 건 편안하게 느껴."
"나는 위험을 느낄 때 이렇게 반응하고, 편안할 때는 이렇게 반응해."
이런 데이터를 모아서 패턴화한 것.
이게 요즘 유행하는 "나 찾기"다.
성격검사가 하는 일이고, 무물보 같은 것들이 하는 일이고, 어느 정도는 사주가 하는 일이다.
나는 이걸 1차원적 나라고 부른다.
틀린 건 아니다. 근데 얕다.
왜 얕은가.
이건 내 반응의 목록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비를 좋아해"는 나에 대한 정보지만, 왜 비를 좋아하게 됐는지, 그 이유가 만들어진 순간은 빠져 있다.
진짜 나 찾기는 한계상황에서의 반응, 그리고 그 반응이 만들어진 이유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찾아진다.
"나는 위기가 오면 도망친다"가 아니라, "내가 처음 도망친 건 언제였고, 그때 나는 뭘 지키려고 했고, 그게 왜 지금까지 남아 있는가."
이걸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같은 패턴을 갖고 있어도 다른 사람이다.
10. 패턴을 보는 눈에 대하여
다만 하나 조건이 있다.
패턴을 보려면 패턴을 볼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야스퍼스가 정신과 의사였다는 얘기를 왜 굳이 했냐면, 이 부분 때문이다.
뇌과학 쪽에서는 도파민을 "중요함의 신호"로 보는 가설이 있다.
뭔가가 나에게 의미 있다고 표시해주는 형광펜 같은 것.
이 형광펜이 과하면 모든 것이 의미 있어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의 눈빛, 우연히 본 숫자,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
모든 것에서 신호를 읽으면 그건 통찰이 아니라 병이 된다.
반대로 형광펜이 말라버리면 아무것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어떤 패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삶이 회색이 된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삶의 충동 반대편에 죽음의 충동이 있다고 썼는데,
나는 우울이란 형광펜이 다 말라버린 사람이 마지막 남은 색을 그 반대편 충동에서 끌어오는 상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 밑바닥을 보라는 말은 밑바닥에 눌러앉으라는 말이 아니다.
거기 오래 있으면 패턴을 볼 눈 자체가 상한다.
그 모든 것을 겪고, 흘려보낸 다음에, 자기를 돌아보라.
이 순서가 중요하다. 겪는다. 흘려보낸다. 그다음 본다.
어떤 패턴이 보일 테고, 그 패턴을 이미 지나와서 지금 그것을 보고 있는 나.
그게 나다.
패턴이 나인 게 아니라, 패턴을 볼 수 있게 된 자리가 나다.
11. 되는대로 살기, 그리고 계획
그 자리에 서면 두 가지가 가능해진다.
하나는 지금을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
되는대로 산다는 게 아무렇게나 산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있으니 매 순간 나를 검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계획을 세우더라도 진짜 내가 재미를 느끼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
밑바닥을 보기 전의 계획은 대부분 가면의 계획이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있어 보이는 것, 부모가 원했던 것.
밑바닥을 보고 나면 그 계획들이 누구 거였는지가 보인다.
그러고 나서 세우는 계획은 훨씬 작고, 훨씬 이상하고, 훨씬 재밌다.
12. 소명, 그리고 베버
이 "진짜 내가 꽂히는 것"에 종교가 붙여준 이름이 있다.
장로교에서는 '콜링(Calling)'이라고 부르고 우리말로는 '소명'이라고 번역한다.
개념은 간단하다. 어떤 일에 꽂혔다면 그건 하나님이 너를 그리로 부른 거고, 거기서 번창하면 그 부름을 잘 따른 거다.
말하자면 "잘되면 나 잊지 마라" 이런 느낌의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왜 만들어졌고 왜 이렇게 잘 퍼졌는지를 정확하게 추적한 사람이 있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발표된 논문이다.
베버의 추적은 단어 하나에서 시작한다.
독일어 'Beruf'. 지금은 그냥 '직업'이라는 뜻이다.
근데 이 단어에 '부름'이라는 뜻이 들어간 건 루터 때문이었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외경 집회서의 한 구절, "네 일에 머물러라"라는 구절의 '일'을 'Beruf'로 옮겼다.
그 순간 세속의 직업이 신의 부름이 되었다.
중세까지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삶은 수도원에 있었다. 세상을 떠나는 게 신앙이었다.
루터 이후로는 세상 안에서 자기 일을 하는 게 신앙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루터. 그런데 베버가 보기에 진짜 폭발은 칼뱅에서 일어난다.
칼뱅은 예정설을 밀어붙였다. 누가 구원받을지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
내가 뭘 하든 바뀌지 않는다.
장로교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도 이 교리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
이게 신자에게 어떤 심리 상태를 만드는지 상상해보라.
나는 구원받았는가. 알 수 없다. 알 방법이 없다. 그리고 바꿀 방법도 없다.
베버는 이걸 역사상 유례없는 "내면의 고독"이라고 불렀다.
사람은 이 불안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실질적인 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구원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징표는 찾을 수 있다.
신이 너를 택했다면 신은 너의 일을 축복할 것이다. 그러니 네 일에서 번창한다면, 그건 네가 택함받았다는 징표다.
이렇게 해서 열심히 일하고, 번 돈을 흥청망청 쓰지 않고, 다시 일에 투자하는 사람이 가장 신앙 좋은 사람이 되었다.
베버는 이걸 "세속 내적 금욕"이라고 불렀다. 수도사의 금욕을 수도원 밖으로 끌고 나온 것.
그리고 그 금욕이 자본을 축적했고, 그 축적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는 게 베버의 주장이다.
그러니 "부자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자극시키기 좋아서 장로교가 유행한 게 아닌가" 라는 내 직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틀린 절반은 순서다. 부자들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이 교리를 고른 게 아니라, 이 교리가 먼저 있었고 그 교리를 따르다 보니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게 베버의 분석이다.
맞는 절반은 결과다. 일단 그렇게 되고 나면 성공은 축복의 징표가 되고, 실패는 뭔가 잘못됐다는 징표가 된다.
그 구조가 누구에게 유리한지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베버는 이 책 끝에서 유명한 비유를 남긴다.
원래 이 윤리는 가볍게 걸칠 수 있는 외투였는데, 이제는 벗을 수 없는 "강철처럼 단단한 껍질"이 되었다고.
종교는 빠져나갔는데 일해야 한다는 강박만 남은 상태.
한국은 이 껍질을 1885년 언더우드가 들어온 이래 가장 열심히 받아들인 나라 중 하나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 신자 과반이 장로교다.
우리가 일에 대해 느끼는 그 묘한 죄책감과 사명감은 꽤 정확한 족보를 갖고 있다.
13. 소명을 다시 읽으면
그래서 나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버릴 생각은 없다. 다만 거꾸로 읽고 싶다.
베버가 추적한 소명은 불안에서 출발한다. 내가 택함받았는지 모르겠으니 번창해서 증명하자는 것.
근데 밑바닥을 보고 온 사람의 소명은 불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내가 뭔지 이미 봤으니 증명할 게 없다.
남는 건 "그러면 나는 뭘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는가"뿐이다.
그게 꽂히는 것이고, 그걸 소명이라고 불러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번창은 징표가 아니라 부산물이다.
14. 그래서, 어떻게 한계상황에 이르나
여기서 실용적인 질문이 남는다.
한계상황이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죽을 뻔해야 하나. 망해봐야 하나.
야스퍼스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계상황은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 안에 있는 거라고 했다.
죽음, 고통, 투쟁, 죄는 언제나 거기 있다. 우리가 안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문제는 그걸 만드는 게 아니라 그걸 피하지 않는 것이다.
내 답은 이거다.
매사에 진심으로, 빡세게 살아보는 것.
가면을 쓴 채로는 빡세게 살 수 없다. 가면은 적당히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적당히 해야 흠집이 안 나니까.
근데 진심으로 하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벽에 부딪힌다.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걸 못 얻는 순간이 온다.
그때 비겁한 나도 나오고 용감한 나도 나온다.
도망치는 나, 버티는 나, 남 탓하는 나, 그러고 나서 부끄러워하는 나.
그 롤러코스터가 나다.
한 칸이 아니라 롤러코스터 전체가.
15. 방향을 잃었을 때
만약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서도 방향성을 못 잡겠다면,
그때 필요한 게 종교들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빌리라는 말이다.
야스퍼스가 한계상황을 처음 꺼낸 책의 제목이 『세계관의 심리학』이었다는 걸 다시 떠올려보자.
그는 세계관을 사람이 한계상황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지어 올린 집이라고 봤다.
종교는 그 집 중에 가장 오래된 것들이다.
몇천 년 동안 수억 명이 죽음과 고통과 투쟁과 죄 앞에서 버티기 위해 다듬어온 구조물.
내가 처음부터 짓는 것보다 그 집에 들어가서 어디가 튼튼하고 어디가 삐걱대는지 살펴보는 게 빠르다.
그러고 나서 내 집을 짓는 거다.
16. 정신적 유산
나만의 세계관을 만들어간다는 것.
그게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줄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이 아닐까.
돈은 쓰면 없어지고 집은 팔면 남의 것이 된다.
근데 "내가 밑바닥에서 뭘 봤고, 그걸 어떻게 견뎠고, 그래서 지금 무엇을 나라고 부르는가"
이 이야기는 듣는 사람 안에서 다시 자란다.
베버가 추적한 그 윤리도 결국은 누군가의 세계관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한 문명의 형태가 된 이야기다.
우리에게 넘어온 건 불안에서 출발한 세계관이었다.
우리가 넘겨줄 건 다른 것이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