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감으로부터의 도피
고향에 내려왔다. 사람도 별로 없고, 한적하다. 자극적인 요소가 없다.
특히 내 방은 푹신하고 편안하다. 색감도 자극적이지 않다.
그런 방에서 유일한 도파민은 인스타 피드와 카톡이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이 방 안에 혼자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데서 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무능을 메우려는 행위에 divertissement, 기분전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냥꾼은 토끼를 원하는 게 아니라 토끼를 쫓는 동안 자기 자신을 잊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300년 전에는 그게 사냥과 도박이었고, 지금은 손바닥 안에서 ⭐️무한히⭐️ 내려가는 피드다. 도구만 바뀌었을 뿐 목적은 같다. 그러니까 내 방이 고요한 게 문제가 아니다. 나에겐 고요를 견딜 근육이 없다는 게 문제다.
그 마저도 조용해지고나면 나는 이대로 사는게 맞는가. 라는 질문의 하이웨이를 탄다. 바로 불안속으로 가는 것이다. 마치 파피용이 꿨던 꿈 처럼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 받게되는 guilty라는 판결이 마음속에서 이루어진다.
파피용의 재판이 무서운 이유는 죄목이 살인도 강도도 아니라는 데 있다. 인생을 낭비한 죄. 피고는 항변하지 못한다. 증거물이 본인의 인생 전체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유능한 집정관이었던 세네카도 같은 말을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은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다만 흥미로운 건 그가 지목한 낭비꾼이 게으름뱅이가 아니라 바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남의 일정으로 하루를 꽉 채운 자는 자기 인생을 산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판결도 릴스를 본 죄가 아니다. 릴스를 보는 동안 판사석이 비어 있었던 죄에 가깝다.
의미없는 릴스들이 마치 옛날의 팥죽송처럼 구간반복 재생된다.
그런 컨텐츠들로 가득차서 본질을 잊게 되고. 장기 보상회로 회복을 위해 책을 꺼내들지만 얼마 못가 덮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뇌는 쾌락과 고통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항상성을 맞춘다. 짧고 강한 자극을 계속 부으면 저울은 이미 반대편으로 기울어 있고, 그 상태에서 책을 펴는 건 기울어진 접시에 깃털을 얹는 일이다. 금단은 언제나 회복보다 먼저 도착한다. 책이 재미없어진 게 아니라 내 기준선이 올라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 못 가 덮었다"는 건 의지의 실패가 아니라 생리의 시차다. 시차는 견디면 언젠가 맞춰진다.
밖으로 나가본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읽지 않겠는가? 계속 움직이는 자연물들을 보는 것도 정적으로 있는 벽지보다 나을거고. 내면에서 힘을 찾지 못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지만 맹하게 핸드폰만 보는 것 보다 낫다고 합리화를 한다.
이건 합리화가 아니라 설계다. 의지력을 환경에 외주 주는 일. 스토아 학파는 이걸 훈련(askēsis)이라고 불렀고, 벤야민은 걷는 인간에게 산책자라는 이름을 줬다. 그는 권태를 두고 경험의 알을 품는 꿈의 새라고 했다. 알은 가만히 앉아 있어야 부화하지만, 품는 자세는 배워야 한다. 창가 자리, 나무 그늘, 남의 시선. 전부 부화기의 부품이다. 내면에서 힘이 안 나올 때 밖에서 끌어오는 건 나약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룰 줄 아는 기술이다.
카톡이 온다. 다들 일정이 있는지라 대화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자를 주고받던 시절이 차라리 더 빨랐을 것 같다. 아마 그 때의 속도에 길들여져있어 인내심의 그릇이 작은걸지도.
답장 3분이 길게 느껴지는 사람은 3분을 잃은 게 아니라, 3분을 혼자 있을 능력을 잃은 것이다. 여기서도 문제는 상대의 속도가 아니라 내 공백이다.
할일이 없는 날, 그 권태로움을 견디기 힘들다. 권태로움이라는 거, 도파민 없음이라는 거. 그것은 생과 사의 싸움에서 벗어나 인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내공이 축적되는 시간인 것 같다. 왜냐면 이렇게 있다보면 당장 해야할 것을 찾아보다가 이건 나에게 어떤 기쁨일지 생각하고 인생을 통틀어서 봤을 때 지금의 선택은 어느 스택을 쌓게 할지에 대한 계산까지 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시간을 스콜레(scholē)라고 불렀다. 생존 노동에서 풀려난 여백. 학교(school)의 어원이 거기서 나왔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배움은 남는 시간에서만 자란다. 하이데거는 한 발 더 나가서, 깊은 권태 즉 부재 속에서야 비로소 존재 전체가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는 그 무언가만 보인다. 아무것도 없을 때에야 전부가 보인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진자로 봤지만, 그가 덜 말한 게 있다. 진자는 권태 쪽 끝에서 잠깐 멈춘다는 것. 멈춘 그 지점에서만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견디기 힘든 게 맞다. 원래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 제일 힘들다.
레져도 어느정도까지 하다보면 흥미를 잃는 순간이 있다. 그 때를 슬럼프라고 부르는 것 같고. 버티고 계속 하면 고수가 되는 듯 한데. 지금 레져의 전 분야에서 슬럼프에 빠져있다. 어느정도 안다는 오만함이 불러오는 고통. 몰라야 재미있다. 초심이라는 건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도파민이 주는 마음가짐을 잊지마라는 말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칙센트미하이의 지도를 겹쳐보면 좌표가 정확히 찍힌다. 그는 실력과 난이도를 두 축으로 놓고, 난이도가 실력보다 높으면 불안, 실력이 난이도보다 높으면 권태, 둘이 팽팽할 때 몰입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 위로는 불안(이대로 사는 게 맞나)에, 아래로는 권태(레져 전 분야 슬럼프)에 동시에 걸려 있다. 두 개의 병이 아니라 하나의 병이 두 방향으로 터진 것이다. 그러면 처방도 하나다. 난이도를 올리는 것. 슬럼프는 실력이 떨어졌다는 신호가 아니라 판을 키우라는 신호다.
그래서 "몰라야 재미있다"는 절반만 맞다. 정확히는 모르는 구간에 다시 서야 재미있다. 초심은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더 어려운 걸 골라서 스스로 초보가 되는 것이다. 니체가 정신의 마지막 단계에 낙타도 사자도 아닌 아이를 놓은 이유가 여기 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서 노는 게 아니라, 매번 새로 시작할 줄 알아서 논다.
나는 뚜껑에 막혀있던 벼룩인가 자유를 얻어도 제대로 쓰질 못한다. 나. 그레고리 잠자. 다른점이 있다면 뚜껑 밖으로 뛰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했다. 절벽이 무서운 게 아니라 뛰어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는 것이다. 할 일 없는 날이 견디기 힘든 것도 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뭐든 할 수 있어서다. 벼룩의 뚜껑은 유리라서 치워도 보이지 않는다. 그레고리 잠자는 벌레가 되고 나서도 출근 걱정부터 했다. 그러나 이 문단의 핵심은 마지막 줄에 있다. 뛰어본 경험. 유리의 높이만 기억하는 벼룩과 그 위로 넘어가 본 벼룩은 다른 종이다. 전자는 한계를 믿고 후자는 데이터를 가졌다.
레그프레스를 하자. 허벅지를 강화시켜서 사냥직전의 고양이처럼 뒷벅지에 힘을 응축하는 것이다. 카이토를 끔살하기 전의 네페르피트처럼.
그러고 있을 때 놀자고 연락이라도 오면 못말림. 바로 튀어나감. 서로 아다리 맞기는 쉽지않으니 어쩔 수 없이 상호수동적으로 가게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를 찾는 방법을 여러가지를 둬야 풍요로워질텐데. 슬럼프를 이겨낼때까지 드릴 서전트 훈련 고고?
키르케고르는 이 전략에 이름까지 붙여뒀다. 윤작법. 밭을 갈아엎지 말고 심는 작물을 바꾸라는 것. 같은 땅에서 매번 다른 걸 길러내는 능력이 권태에 지지 않는 힘이다. 호이징하 말대로 인간은 애초에 호모 루덴스, 노는 인간이니까 노는 데도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 남의 일정에 의존하는 즐거움 하나만 들고 있으면 내 하루의 결정권을 남의 캘린더에 위탁하는 셈이다.
Status=input(" 몰입, 놀기 중 하나 입력")
Switch(status)
Case 몰입
Case 놀기
Default 권태
그런데 이 코드에는 break가 없다. 몰입도 놀기도 결국 아래로 흘러내려 default에 도달한다. 살면서 이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건 인생에 있는 버그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권태는 예외 처리가 아니라 기본값이다. 몰입과 놀기는 default에서 잠깐 분기해 나갔다가 반드시 돌아오는 case일 뿐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바뀐다. 어떻게 default를 피할 것인가가 아니라, default 블록 안에 무엇을 적어둘 것인가. 지금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채로 실행되니까 피드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
Default 권태:
다리에 힘을 응축한다.
아직 모르는 것을 하나 고른다.
뚜껑이 없다는 걸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