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 도어. 환멸은 병. 공감 다이브.
1. 하나의 낙을 포기하면 다른 낙이 온다
무언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맛있는 걸 너무 자주 먹으면 웬만한 맛있는 것들은 아무렇지 않아지고, 오히려 흥미를 잃는다. 술을 너무 자주 마시면 나중엔 술이 재미없어지고, 더 나중엔 몸이 망가져서 마실 수 없게 된다.
이 감각에는 이름이 붙어 있다.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 1971년 브릭먼과 캠벨이 제안한 개념으로, 사람은 좋은 일이 생기면 잠시 행복해졌다가 곧 원래의 기준선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들이 1978년에 복권 당첨자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들의 행복도를 비교한 연구는 유명하다. 시간이 지나면 두 집단의 일상적 행복감 차이가 예상보다 훨씬 작았다. (표본이 작아 이후 비판도 많이 받은 연구이니, 방향만 참고할 만하다.)
다만 여기서 내 표현을 한 번 고쳐야 할 것 같다. 정해진 건 기쁨의 '총량'이 아니라 기준선이 따라 올라오는 속도다. 총량이 고정되어 있다면 좋은 일을 겪은 사람은 남은 인생에서 그만큼 손해를 봐야 하는데, 실제 연구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기준선은 큰 사건을 겪으면 영구히 이동하기도 한다. 그러니 정확히는 이렇다. 적응은 공짜가 아니다. 어제의 강도는 오늘의 기본값이 된다.
도파민은 기쁨이 아니라 오차에 반응한다
볼프람 슐츠가 원숭이의 도파민 뉴런을 관찰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예고 없이 주스를 주면 도파민이 크게 튀지만, 신호음 뒤에 주스가 나온다는 걸 학습하고 나면 주스 자체에는 반응이 거의 사라진다. 도파민은 보상 자체가 아니라 **"예상보다 좋았다"**는 오차에 반응한다. 켄트 버릿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함(wanting)'과 '좋아함(liking)'이 뇌에서 분리된 회로라는 걸 보여줬다. 반복하면 원함은 남고 좋아함이 먼저 죽는다. 중독자가 하는 말 그대로다. 이제 좋지도 않은데 안 하면 못 견디겠다.
솔로몬과 코빗의 대립 과정 이론은 이걸 저울로 설명한다. 어떤 자극이든 반대 방향의 잔여 과정이 따라붙고, 반복될수록 그 반대쪽이 커지고 오래간다. 애나 렘키가 『도파민네이션』에서 쓴 비유가 이것이다. 쾌락 쪽으로 계속 저울을 누르면 뇌는 균형을 맞추려 반대편에 추를 얹는데, 자극을 멈춰도 그 추는 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저울이 고통 쪽으로 기운 채 고정된 상태 — 그게 금단이고, 무기력이고, 아무것도 재미없는 상태다.
귀문관과 아귀
나는 그것을 "돈귀신에 씌인다", "귀문관이 열린다"라고 표현해왔다. 낙에 집착하는 떠돌이 정신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정해진 낙을 다 써버린 상태.
불교의 **아귀(餓鬼)**가 정확히 그 그림이다. 배는 산더미만 한데 목구멍은 바늘구멍이어서, 먹어도 먹어도 굶주리는 존재. 음식이 입에 닿으면 불로 변한다는 묘사도 있다. 이건 도덕적 처벌의 은유라기보다 내성(tolerance)의 현상학에 가깝다. 용량은 무한히 늘어나는데 흡수하는 통로가 좁아진 상태. 더 많은 도파민, 더 멀리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지고, 그 도파민을 어떻게든 구하려다 종국엔 인간성을 잃는 게 도박이나 마약이다. 나를 지키려 현실에서 벗어났는데 돌아오기엔 너무 멀어져 있다면, 그곳의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다.
반대편 — 기준치가 내려가면 빵 한 조각이 커진다
반대로, 낙이 없는 상태를 버틴다면? 언젠가는 낙으로 돌아올 테다.
물론 굴라그에 보내지거나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소소한 낙을 찾는다. 완전한 '낙 없음'은 아닌 셈이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영하 27도의 수용소에서 빵을 아껴 두고, 죽 한 그릇을 더 얻고, 담배 한 개비를 챙긴 하루를 두고 거의 운이 좋았던 날이라고 마무리한다. 빅터 프랭클도 아우슈비츠에서 석양이 아름다웠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던 순간을 적었다.
이건 낙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 참조점(reference point)이 이동한다는 증거다.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전망 이론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람은 절대적 크기가 아니라 기준선으로부터의 변화량에 반응한다. 기준치가 바닥까지 내려가면 빵 한 조각의 밀도가 올라간다. 돌아와 가족을 볼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라. 그 순간에는 100% 이상의 낙을 느끼는 게 아닐까.
그래서 중용
결론은 중용이다. 덜 먹으면 살 빠지는 기쁨을 느끼는 것. 재미가 너무 커질 것 같으면 알아채고 잠시 내려놓는 것.
여기서 중용을 '적당히'로 오해하면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중용(mesotēs)은 산술적 중간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중간이고, 판단이 아니라 습관(hexis)으로만 얻어진다. 운동선수의 식사량이 일반인의 두 배여도 그 사람에겐 그게 중용이다. 『논어』의 過猶不及(과유불급),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는 말도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재미있는 건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의 결론이 절제였다는 점이다. 그가 실제로 권한 건 빵과 물, 그리고 대화였다. 격렬한 쾌락은 반드시 대가를 청구하니, 고통 없음(아포니아)과 동요 없음(아타락시아)이야말로 가장 오래가는 쾌락이라는 것.
실무적으로 옮기면 세 가지다. 간격을 둘 것(적응은 시간으로 리셋된다). 종류를 바꿀 것(같은 자극의 반복이 내성을 만든다). 일부러 비울 것(참조점을 내려두면 같은 것이 더 크게 온다).
가끔 터지는 100%의 기쁨으로 살기보다는 30~50%의 기쁨으로 오래 살기. 그게 목표다.
2. 모든 환멸은 병
정신 상태의 병리적 현상이라는 건 기존의 그 사람의 정신이 변성된 것을 말한다. 양극성을 제외하면, 부정적인 감정으로의 변성이 병리적이다. 사람을 환멸하게 되면 여러 병리적 현상이 파생된다. 편집증, 분노, 우울감.
제목을 조금 다듬어야겠다. 환멸 자체는 병이 아니다. 환멸을 처리하는 방식이 병이 된다.
환멸(幻滅)은 글자 그대로 '환상이 멸하는 것'이다. 영어의 disillusion도 착각(illusion)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즉 환멸의 재료는 상대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씌워둔 상(像)**이다. 상대는 변하지 않았고, 다만 내가 붙여둔 이미지가 떨어져 나갔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보면 환멸은 정보에 가깝다. 병은 그 정보가 도착한 다음에 시작된다.
환멸이 오는 두 개의 입구
환멸의 이유를 내 마음에 빗대어 보자면 두 가지다.
첫째, 내가 싫어하는 내 안의 모습을 가진 사람을 봤을 때. 융이 말한 그림자(shadow)의 투사가 이것이다. 의식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내 성질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으로 내려가 있다가, 그 성질을 가진 타인을 만났을 때 과도한 혐오로 튀어나온다. 융의 관점에서 강한 혐오는 상대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나에 대한 진단서다. 세상에 결점 있는 사람은 널렸는데 왜 하필 그 결점만 못 견디는가 — 이 질문이 대개 정답을 가지고 있다.
둘째, 누군가가 나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다고 느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부당한 대우란 나를 죽이는 게 아니다. 나에게 참조를 실수로 안 걸었다가 나중에 알려준다거나(차라리 모르면 화가 안 난다), 내 개성을 누군가 가져가 자기 개성처럼 쓸 때다.
사소해 보이는 이 예시들이 실은 정확하다. 인간은 손해의 절대량이 아니라 공정성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다. 최후통첩 게임 실험이 그 증거다. 한 사람이 돈을 나누고 다른 사람이 수락/거절만 결정하는데, 거절하면 둘 다 0원이다. 합리적으로는 1원이라도 받는 게 이득이지만 실제 사람들은 지나치게 불공정한 제안을 손해를 감수하고 거절한다. 불공정은 손실보다 비싸다.
그리고 참조 누락 같은 일이 아픈 건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소속과 지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이젠버거 연구팀의 사이버볼 실험에서, 온라인 공놀이에서 따돌림당한 참가자의 뇌는 신체적 통증을 처리하는 영역과 겹치는 부위가 활성화됐다(이후 해석을 두고 논쟁이 있는 연구이긴 하다). "차라리 모르면 화가 안 난다"는 내 문장이 여기서 설명된다. 아팠던 건 정보의 결핍이 아니라 내가 빠져 있었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개성을 가져가는 것도 같은 계열이다. 자원을 뺏긴 게 아니라 귀속(authorship)을 뺏긴 것이라 더 아프다.
편집 → 분노 → 우울, 그리고 출구
그런 게 반복되면 편집이 시작된다. 머릿속에서 데이터들이 조합되기 시작하고, 갑자기 리그레션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경향성을 발견하게 되면 이후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분노하게 된다.
이 자기관찰은 꽤 정확한데, 문제는 이 회귀 분석에 반증 데이터가 입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확증 편향은 가설에 맞는 사례만 수집하게 하고, 착각적 상관은 무관한 두 사건 사이에 없는 규칙을 그려낸다. 노이즈에서 패턴을 읽어내는 성향을 아포페니아라고 부른다. 위협 탐지 시스템으로서는 합리적인 설계다. 열매를 뱀으로 잘못 보는 비용보다 뱀을 열매로 잘못 보는 비용이 훨씬 크니까. 대신 평시에는 오탐이 압도적으로 많다.
분노가 통하지 않으면 우울해진다. 좌절-공격 가설(달러드 외, 1939)이 말하듯 분노는 대개 차단된 통제감을 회복하려는 시도다. 그 시도마저 효과가 없다는 걸 반복 학습하면 셀리그먼이 말한 학습된 무기력으로 넘어간다. 울그락불그락 하며 모든 수를 써봤는데 바뀌는 게 없으면, 이제는 받아들이고 살거나 도망친다.
경제학자 앨버트 허쉬먼은 조직에 불만이 생겼을 때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를 셋으로 정리했다. 이탈(Exit), 항의(Voice), 충성(Loyalty). 내가 쓴 "받아들이고 살거나 도망친다"가 정확히 충성과 이탈이다. 그런데 나는 중간의 항의를 건너뛰었다. 정확히는, 항의를 제자리에서 하지 못해 그것이 지하로 샜다.
내 마음에는 토네이도가 치지만 주변은 평화롭다. 그걸 또 견딜 수 없어한다. 그래서 나는 주변을 내 폭풍에 밀려들게 하고자 했다. 같이 환멸해주길 바라며 아주 어린 수준의 네거티브, 이른바 정치질을 한 것이다. 정치질은 갈 곳을 잃은 항의의 변형이다. 상대에게 직접 향하지 못한 목소리가 제3자를 경유해 흘러나온 형태.
하지만 주변인들은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짐작이 아니라 꽤 잘 검증된 현상이다. 스포트라이트 효과 — 길로비치 연구팀은 참가자에게 민망한 티셔츠를 입혀 방에 들여보낸 뒤 몇 명이 알아봤을지 물었다. 참가자들은 절반쯤 봤으리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그 절반에도 못 미쳤다. 내 폭풍의 관객 수는 언제나 내 예상보다 적다. 결국 내 얼굴에 똥칠한 꼴이 된다. 허나 그 당시 변성된 감정 상태에서는 알 수가 없다.
그 친구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과하고 싶다. 다만 사과에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고 생각한다. 사과는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손해를 인정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전자가 되는 순간, 사과는 상대에게 두 번째 부담이 된다.
3. 공감이라는 다이빙
얕은 공감으로 상대의 감정에 들어가다 보면 너무 깊은 곳까지 갈 수 있다. 그러다 상대의 감정 안에 말려들고, 공감할 수 없는 영역에서 선한 의도도 공격받을 수 있다. 타고난 공감 능력은 있지만 감정을 버틸 만한 보호장구는 없는 것이다.
다이빙이라는 비유는 끝까지 밀어볼 가치가 있다. 실제 잠수에서 30m 아래로 내려가면 질소 마취가 온다. 다이버들 사이에 '마티니 법칙'이라는 농담이 있는데, 10m 내려갈 때마다 마티니 한 잔을 마신 것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무서운 건 통증이 아니라 본인이 판단력을 잃었다는 걸 스스로 모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진짜 위험은 내려갈 때가 아니라 올라올 때 온다. 급하게 부상하면 혈액에 녹아 있던 질소가 기포가 되어 감압병을 일으킨다. 그래서 다이버는 중간 수심에서 멈춰 감압 정지를 한다.
감정도 똑같다. 깊이 들어간 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곧장 일상으로 올라오면, 그날 밤이나 며칠 뒤에 기포가 터진다.
장비의 정체
폴 블룸은 『공감의 배신』에서 정서적 공감을 스포트라이트에 비유했다. 밝지만 좁고, 아는 사람 쪽으로 편향되고, 무엇보다 금방 소진된다. 그는 감정적 동일시 대신 이성적 연민(compassion)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타니아 징어의 연구는 이 차이를 실제로 나눠 보여줬다. 훈련 참가자들에게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공감 훈련'을 시켰을 때는 부정 정서와 소진이 늘었지만, 고통받는 이의 안녕을 바라는 '자비 훈련'을 시켰을 때는 긍정 정서와 돕는 행동이 늘었고 관여하는 신경망 자체가 달랐다. 함께 빠지는 것과 곁을 지키는 것은 다른 기술이다. 소진된 사람은 아무도 건지지 못한다. 상담과 간호 분야에서 말하는 공감 피로(compassion fatigue), 2차 외상이 바로 장비 없이 반복 잠수한 결과다.
가장 짧은 정의는 칼 로저스가 남겼다. 공감이란 상대의 세계를 '마치 그것이 내 것인 양(as if)' 느끼되, 그 as if를 결코 잃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글자가 내가 찾던 보호장구다. 잃는 순간 그건 공감이 아니라 감정 전염이 된다.
방어기제 아래의 진심
대체로 자신의 아픈 부분은 단단하게 보호하고 있지만, 공감이 깊어지고 무장이 풀어지면 방어기제들이 나온다.
방어기제를 처음 체계화한 건 안나 프로이트고, 조지 베일런트는 하버드 성인발달연구를 통해 그것을 위계로 정리했다. 부정, 투사 같은 미성숙한 방어에서 이타주의, 유머, 승화 같은 성숙한 방어까지. 중요한 건 방어기제가 인격의 결함이 아니라 압력을 견디는 구조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그것이 흔들린다는 건 그 아래 지킬 것이 있다는 뜻이다.
연구 발표 후 디펜스 할 때 사람들을 보면, 압박 질문을 받다가 교수님한테 울컥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그 사람이 준비에 꽤나 진심이었다는 걸 볼 수 있다. 울컥함은 논리가 부족했다는 신호가 아니라 투자한 것이 있다는 신호다.
겉으로 드러나는 페르소나를 걷어낸 뒤에 나오는 방어기제, 그다음의 진심. 융의 페르소나 개념이나 위니콧의 참자기·거짓자기 논의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게 있는데, 외피 자체는 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 가면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밖에 남지 않았을 때다.
그 방어기제를 파고들 때는 개인적으로 방어기제를 내려놓았던 경험이 필요하고, 발견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이게 곧 다이빙 로그다. 자기 무장을 풀어본 적 없는 사람의 깊은 공감은 구조가 아니라 동반 익사가 되기 쉽다.
난을 키우는 일
그 뒤의 진심을 끌어내는 게 진정한 공감인 것 같다. 그러려면 일단은 얕은 물부터 들어가야 하니 얕은 공감도 필수다. 감정을 만지는 건 꽤나 섬세한 작업이다. 난을 키우는 것에 비견할 수 있을까?
이 비유가 마음에 드는 이유가 있다. 난은 대개 물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넘쳐서 죽는다. 과습으로 뿌리가 썩는 게 가장 흔한 사인이다. 애정의 양이 아니라 배수와 간격이 관건이라는 것.
덧붙여 발달심리학에는 '난초 아이·민들레 아이' 가설이 있다. 민들레형은 어떤 환경에서도 그럭저럭 자라지만, 난초형은 환경이 나쁘면 가장 먼저 시들고 환경이 좋으면 가장 크게 핀다. 민감성은 취약함이자 잠재력이라는 이야기다. 공감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상대만 난을 키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난이기도 하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