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함정

생각의 함정

기획에서 가장 어려운 건 아이디어가 아니다.

아이디어는 오히려 쉽게 온다. 회의 중에, 출퇴근길에, 샤워하다가.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아이디어를 현실의 좌표 위에 올려놓는 일. 예산과 인력과 일정과 승인 절차를 통과한 뒤에도 여전히 현실에 살아있는 형태로 깎아내는 일.

그래서 기획은 상상력의 작업이라기보다 연금술 작업에 가깝다. 머릿속에서만 성립하는 언어를, 현실에서도 성립하는 가치로 옮기는 것.

근데 무조건 막히는 지점이 생긴다. 그건 한스짐머나 하야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리 소리는 아름다웠다

막히는 지점에서 사람이 갈린다.

어떤 사람은 고집스럽게 형태를 붙잡고 현실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후자가 되는 순간, 기획자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다.

이 이야기에서 정말 무서운 부분은 사나이가 아니다. 따라간 사람들 쪽이다. 아무도 끌려간다고 느끼지 않았다. 피리 소리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기획의 비전은 정확히 그 피리 소리다. 그림이 선명할수록 소리가 좋다. 소리가 좋을수록 팀은 질문을 줄인다. 그래서 비전을 가진 사람이 방향을 틀지 못할 때, 한 사람만 늦는 게 아니라 팀 전체가 같은 속도로 데드라인이라는 절벽에 도착한다.

설득력은 기획자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리고 방향이 틀린 순간, 그 자산은 그대로 부채가 된다. 혼자 틀렸다면 혼자 돌아왔을 텐데, 설득이든 규율이든 성공했기 때문에 다 같이 못 돌아온다.

유동적인 움직임은 고집에 대해 소심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피리 소리를 스스로 의심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노드가 두 개뿐인 모델

그럼 무엇이 우리를 못 움직이게 하는가.

나는 그게 대부분 '옳고 그름'이라는 덫이라고 생각한다. 이분법적 사고. 이걸 딥러닝에 비유하면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1958년에 만들어진 퍼셉트론이라는 초기 신경망 모델이 있다. 입력을 받아 하나의 선을 긋고, 그 선을 기준으로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판단한다. 단순하지만 잘 작동했고, 사람들은 기대했다.

그런데 1969년에 이 모델의 한계가 증명된다. XOR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 XOR은 "둘 중 하나만 참일 때 참"이라는 조건이다. 말로 하면 쉽다. 그런데 이 조건은 직선 하나로는 절대 나눌 수 없다. 참인 영역이 대각선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증명 이후 신경망 연구는 십수 년간 겨울을 맞는다.

기획에서 우리가 자주 마주치는 질문의 정체가 정확히 이거다.

"A안이 맞나, B안이 맞나."

이 질문은 직선 하나를 긋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실제 정답은 A의 앞부분과 B의 뒷부분, 혹은 A를 B의 예산 구조로 돌리는 방식처럼, 직선 하나로 나뉘지 않는 자리에 있다. 세상이 비선형이라는 말은 낭만적인 수사가 아니다. 아주 실무적인 진단이다.

노드가 두 개뿐인 모델은 빠르다. 결론이 언제나 두 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회의에서 제일 먼저 말하는 사람이 되기에도 유리하다. 다만 다양한 정답과는 멀어진다.

그런데 이분법은 죄가 없다

여기서 원래 글이 스스로 만들어놓고 넘어간 모순이 하나 있다. 이분법에서 벗어나라고 해놓고, 그 모든 것의 바탕에 수많은 이분법이 있다고 인정해버린 것.

이건 사실 모순이 아니라 이 글의 핵심이다.

신경망은 이분법을 없애서 XOR을 푼 게 아니다. 뉴런 하나하나는 여전히 켜지거나 꺼진다. 여전히 둘 중 하나다. 해법은 층을 쌓는 것이었다. 판단 하나를 최종 답으로 쓰지 않고, 그 판단의 출력을 다음 판단의 입력으로 넘기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분법이 아니다. 한 층짜리 이분법이다.

판단을 한 번 하고 그것을 결론으로 확정해버리는 습관. 그게 좁은 방을 만든다.

이 관점에서 보면 흥미로운 역전이 생긴다. 유연한 기획자는 이분법을 덜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한다. 다만 나란히 늘어놓지 않고 순서대로 겹쳐 쌓는다.

"이건 예산 문제인가 구조 문제인가" → 구조 문제다. "그럼 이 구조는 우리가 못 바꾸는 건가 안 바꾼 건가" → 안 바꾼 쪽에 가깝다. "안 바꾼 이유는 관성인가 리스크인가" → 리스크다. "그 리스크는 실제인가 예상인가."

각 질문은 여전히 둘 중 하나다. 그런데 네 번 겹치면 답은 열여섯 갈래로 벌어진다. 이게 층을 쌓는다는 말의 실제 감각이다. 처음부터 열여섯 가지를 상상해내는 게 아니라, 두 갈래짜리 질문을 네 번 참는 것.

층을 쌓는 데 드는 비용

그런데 왜 우리는 대부분 한 층에서 멈출까.

층을 하나 더 쌓는다는 건 기술적으로는 간단한 일이다. 다만 심리적으로는 특정한 문장을 통과해야 한다.

방금 내가 내린 판단은 최종 답이 아니다.

특히 그 판단을 이미 입 밖으로 냈다면, 회의에서 말했다면, 문서에 적어 공유했다면, 가격은 더 오른다. 우리는 자기가 낸 결론을 방어하는 데 원래 그 결론을 만드는 데 든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쓴다.

'내가 옳아'라는 방이 좁은 이유는 벽이 두꺼워서가 아니다. 창문이 하나뿐이라서다. 그 방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정확하다. 다만 하나뿐이다.

촉은 압축 파일이다

여기서 '촉'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한다.

경력이 쌓이면 촉이 생긴다. 문서를 보자마자 이건 안 되겠다는 감각, 사람을 만나자마자 이 협업은 오래 못 가겠다는 감각. 이걸 신비한 능력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촉은 신비가 아니라 학습된 가중치다. 지금까지 겪은 데이터로 만들어진 압축 파일. 그래서 대부분 잘 맞는다. 압축이 잘 되어 있으니까. 근거를 언어로 풀어내기 전에 결론부터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원본을 다시 펼치지 않고 결과만 꺼내 쓰기 때문이다.

문제는 압축의 조건이다. 그 파일은 특정 분포 안에서 만들어졌다. 그 조직, 그 카테고리, 그 시장, 그 사람들. 조건이 바뀌면 잘 맞던 가중치가 그대로 오답이 된다. 이걸 분포 변화라고 부른다. 모델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세상이 옮겨가서 생기는 오류다.

그래서 촉이 강한 사람일수록 위험할 수 있다. 촉이 나빠서가 아니다. 확신의 크기가 데이터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 번 맞힌 사람의 확신과 백 번 맞힌 사람의 확신은 체감상 별 차이가 없다. 새로운 판에 들어갔을 때 그 확신만 그대로 따라온다.

내 감각이 틀릴 수 있다는 인정은 그러니까 겸손의 문제가 아니다. 정확성의 문제다. 나는 이 감각을 어떤 데이터로 만들었고, 지금 상황은 그 데이터 안에 있는가. 이 질문 하나가 층 하나다.

다만, 열어두기만 하면 그것도 절벽이다

균형을 맞춰야 한다. 안 그러면 이 글은 그냥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흔한 이야기가 된다.

무한히 열어둔 기획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서 앉은뱅이가 된다. 결론은 같다. 도착하지 못한다. 데드라인은 확신하는 사람에게도, 확신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온다.

유동성이 우유부단으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무엇을 고정하고 무엇을 놓을지가 명확해야 한다. 내 기준은 이렇다.

고정하는 것: 목적. 이 기획이 성공했을 때 누가 무엇을 얻는가. 어떤 상태가 되길 원하는가. 이건 끝까지 붙잡는다. 여기가 흔들리면 논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메인 도그마.

놓는 것: 형태. 광고는 팝업으로? 배너로? 온라인으로?, 이 채널이어야 한다, 이 시점이어야 한다, 이 이름이어야 한다. 전부 놓을 수 있어야 한다. 형태는 목적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막혔을 때 던져야 할 질문은 "내 안이 맞나 틀렸나"가 아니다. 그 질문은 다시 한 층짜리다.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건 목적인가, 형태인가."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절벽까지 끌고 가는 건 목적이 아니라 형태다. 목적은 웬만해선 틀리지 않는다. 애초에 팀이 동의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못 놓는 건 그 목적을 처음 상상했을 때 함께 떠오른 그림이다. 그건 비전이 아니라 비전의 첫 번째 초안일 뿐이다.

자유라는 말의 뜻

정리하면 이렇다.

이분법이 문제가 아니라 한 층에서 멈추는 게 문제고, 층을 쌓는 비용은 방금의 내가 틀렸을 수 있다는 인정이다. 촉은 신비가 아니라 특정 조건에서 만들어진 압축 파일이고, 조건이 바뀌면 그대로 오답이 된다. 그렇다고 다 열어두면 주저앉는다. 그래서 목적은 고정하고 형태는 놓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결론이 자유라는 말이라면, 그건 아마 우리가 흔히 쓰는 의미의 자유는 아닐 것이다.

아무 데나 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길이 하나가 아님을 안다는 뜻에 가깝다. 판단을 지금 당장 끝내지 않아도 된다는 결재에 가깝다.

피리를 그만 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리는 계속 좋아야 한다. 다만 발자취를 보자.

절벽 앞에서 방향을 트는 건 비전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비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거기로 가는 길이 이 길 하나가 아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