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낭만은 정진이다
낭만이라는 말의 내력
낭만 = 로망.
두 단어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걸 알고 나면, 이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12세기 프랑스에서는 라틴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입에 올리던 속어—로망스어—로 적힌 이야기를 '로망(romanz)'이라 불렀다. 성직자의 언어가 아니라 저잣거리의 언어로 쓰인 이야기. 낭만은 애초에 권위의 반대편에서 태어난 말이었다.
낭만(浪漫)이라는 한자는 한참 뒤에 붙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이 romantic을 음으로 옮기면서 물결 랑(浪), 질펀할 만(漫)을 골랐다. 뜻이 아니라 소리를 따라간 글자인데, 우연치고는 잘 어울린다. 흘러넘치는 것. 둑을 넘어 번지는 것. 정해진 그릇에 담기지 않는 것.
그때의 낭만은 원대한 목표나, 계산적이지 않은 사랑을 그렸다.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 떠나는 사람. 이룰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마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언젠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낭만적인 것들은 대개 수고로운 것이다."
이 문장이 오래 남았다.
낭만적인 것들은 대개 수고롭다
낭만을 찾아 떠나는 젊은이들을 보라.
무전여행을 가고, 돈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의 목표를 위해 부대끼면서 무대를 준비한다. 아니면 반대로, 돈을 들이더라도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기 위해 여러 가지를 궁리하고, 수차례의 시도 끝에 예쁜 결과물을 남긴다.
두 경우의 방향은 정반대인데 성질은 똑같다. 둘 다 손해를 감수한다. 비용 대비 효용이 나쁜 선택을 일부러 한다.
효율의 언어로 번역하면 낭만은 전부 어리석은 짓이 된다. 날아서 갈 걸 왜 걸어가나, 걸어서 며칠 거리 비행기로 두 시간인데. 한 장 건지려고 왜 백 장을 찍나, 어차피 올리는 건 한 장인데. 맞는 말이다. 그런데 걸어간 사람은 비행기 탄 사람이 얻지 못한 것을 얻는다. 백 장을 찍은 사람은 그 한 장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다.
수고는 낭만의 부작용이 아니라 재료다. 값을 치르지 않은 것은 마음에 자국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기억을 소중하게 여길 때, 그 기억이 아름다워서인 경우보다 그걸 얻느라 뭔가를 내주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시간이든, 체력이든, 자존심이든.
그러니까 낭만은 감정의 이름이 아니라 지불의 이름에 가깝다.
FLEX가 지나간 자리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느껴진다. 낭만적인 것들이 FLEX를 대신해 자리 잡아가는 듯하다.
FLEX는 결과의 전시였다. 살 수 있음의 증명. 반면 낭만은 과정의 전시다. 겪었음의 증명. 전자는 돈이 있으면 하루면 끝나고, 후자는 돈이 있어도 시간과 수고가 없으면 못 한다.
여기엔 전 세계 사람들의 콘텐츠 제작 능력이 향상된 것도 한몫한다. 예전 같으면 마음속에만 있었을 장면이 지금은 어떻게든 형태를 얻는다. 누구의 낭만이 더 낭만적인가를 겨루는 SNS 특유의 비교문화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양질의 낭만적인 것들이 나오기도 한다. 경쟁이 기준선을 올린 셈이다.
물론 반문이 생긴다. 계산 없는 아름다움을, 계산해서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전시를 전제로 한 낭만이 낭만일 수 있나.
나는 그래도 남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연출할 수 있지만 걸어간 거리는 연출할 수 없다. 밤새 무대를 세운 시간은 조작이 안 된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어도, 지불한 값은 진짜다. 낭만이 비교재가 되는 건 유감이지만, 비교하느라 실제로 뭔가를 해내는 건 나쁘지 않은 거래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시대의 결과이기도 하다. FLEX가 지나간 건 사람들이 갑자기 고결해져서가 아니라, 소비력이 떨어져서일 것이다. 살 수 있는 게 줄어드니 겪을 수 있는 것으로 옮겨갔다. 껍데기가 벗겨지고 진짜 알맹이만 남은 것 아닐까.
12세기에는 왜 낭만이 필요했나
12세기의 낭만사조는 왜 생겼을까.
그때는 십자군 전쟁 시기였다. 기사도 정신, 전쟁 나가기 전의 애틋한 사랑, 영웅담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을 것이다. 도시가 커지고 있었고, 남프랑스에서는 음유시인들이 궁정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기사도 이야기는 기사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쓰인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쓰였다. 당시의 기사 상당수는 무장한 지주이자 약탈자에 가까웠다. 예의와 절제와 순정을 그린 이야기는, 그런 것이 부족한 자리에 세워진 간판이었다.
이상은 언제나 결핍의 자리에 세워진다. 낭만은 있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 없는 것을 그린다.
그럼 지금은 왜 낭만이 유행할까
접촉 없이 소통하고, 전쟁 중이긴 한데 이렇다 할 영웅담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없는 건 뭘까.
나는 '마찰'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즉시 도착한다. 주문은 다음 날 오고, 궁금증은 3초 만에 해결되고, 관계는 스와이프로 시작해서 읽씹으로 끝난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 거의 없다. 취소 가능하고, 환불 가능하고, 차단 가능하다.
편리한데, 자국이 안 남는다.
그래서 오래 걸리는 것이 희소해졌다. 손이 많이 가는 것, 되돌릴 수 없는 것, 몸을 써야만 얻어지는 것. 12세기 사람들에게 없던 게 '기사다움'이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없는 건 '수고'다. 결핍이 이상을 만든다는 규칙이 맞다면, 지금 낭만이 유행하는 이유는 정확히 그것이다.
결국, 계산 없는 아름다움과 사람 간의 협동을 찾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 같다.
협동이라는 이름의 낭만
공산주의가 나온 이유도, 이상적으로는 사람 간의 협력이 하나의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근본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각자의 능력만큼 내고 각자의 필요만큼 가져간다는 문장은, 문장만 놓고 보면 대단히 낭만적이다.
흥미로운 건 그것이 실패한 방식이다. 협동을 제도로 만들어 강제하는 순간, 협동은 노동이 되고 낭만은 의무가 된다. 자발적으로 내주는 것과 내놓으라고 요구받는 것은 겉으로 같아 보여도 완전히 다른 일이다.
낭만은 강제되면 죽는다. 값을 스스로 치를 때만 값이기 때문이다. 시켜서 밤을 새운 사람과 하고 싶어서 밤을 새운 사람은, 같은 밤을 보내고도 다른 아침을 맞는다.
나만의 낭만은 투쟁이다
나만의 낭만은 투쟁이다.
투쟁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정반합으로 발전하며, 내가 성장해가는 걸 좋아한다. 부딪히는 게 좋다는 뜻이 아니다. 부딪혀야만 드러나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내 생각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어디서 무너지는지는 혼자 앉아 있으면 절대 모른다. 반대편이 밀어봐야 안다.
그런데 그러려면 상대가 필요하다.
이게 이 낭만의 까다로운 점이다. 혼자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다. 그리고 좋은 상대는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실력이 다르면 대화가 안 되고, 성의가 다르면 부딪힘이 성립하지 않는다. 밀면 넘어가버리거나, 밀어도 꿈쩍 않고 무시당하거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좋은 상대를 찾으려면 나도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 짝소리가 난다.
그러니 좋은 적수는 운이 아니라 자격에 가깝다. 내가 어떤 수준에 도달했을 때, 그 수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을 만나려고 올라가는 것이지, 올라가서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다.
실력은 노력에서 온다고 믿는다. 재능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노력 말고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낭만은 정진이다
정진(精進)은 원래 불교의 말이다. 육바라밀 중 하나. 흔히 '열심히 함'으로 옮기지만, 정확히는 '물러서지 않고 나아감'에 가깝다.
이 말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도착지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 이르기 위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나아가는 것 자체가 내용이다. 목표를 이루면 끝나는 게 아니라, 목표는 계속 나아가기 위한 핑계에 가깝다.
그래서 정진은 계산이 안 된다. 언제 끝나는지 모르고,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고, 끝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 손익을 따질 수 없는 일에 매일 값을 치르는 것. 그거야말로 낭만의 정의 아닌가.
물론 값은 비싸다. 정진을 낭만으로 삼으면 쉬는 게 늘 조금 불편해진다. 어제의 나보다 나아지지 않은 하루는 어쩐지 빚처럼 남는다. 이 녀석은 다정하지 않다.
꽤나 수고로운 녀석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래도 나는 이 수고가 좋다. 이게 없으면 나는 그냥 편안한 사람이 될 텐데, 편안한 사람에게는 부딪힐 상대가 찾아오지 않는다. 낭만이 수고로운 게 아니라, 수고로운 것만이 낭만이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대들의 낭만은 무엇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