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은 방황처럼 생기지 않았다
자아실현은 용기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시작하는 데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누구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결과물은 제각각이다. 차이가 생기는 부분은 설득력이다. 설득에 필요한 요소로 아웃풋의 완성도는 기본이고, 작가의 삶도 한몫한다. 같은 문장이라도 누가 썼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인생론과 사막을 건너온 사람의 인생론이 같은 취급을 받지 않는 이유다.
인생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라고 생각해본다면, 서사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가 설득력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하겠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기승전결이 있는 삶과 그냥 흘러가버린 삶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설득력 있는 자아의 아웃풋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서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래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수천 년 동안 겪고 정리해둔 서사의 문법을 미리 훑어보는 일이니까. 일종의 예습이다.
하지만 인문학은 어디까지나 남이 그린 지도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극한의 서사를 만나게 될 테고, 그건 대체로 지도에 없는 구간이다. 그리고 서사의 끈을 놓아버린 상태를 우리는 방황이라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방황의 과정을 다룬 서사를 아무리 읽었더라도, 공감하고 가슴에 남기기는 직접 방황을 하기 전까지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싯다르타를 읽었다고 싯다르타가 되는 게 아니다. 밑줄까지 그어놓고도 정작 내 차례가 오면 처음 보는 문제처럼 군다.
실존적 체험이 다가오는 순간은 인문학적 깊이가 바닥났을 때다. 배운 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점. 그때부터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는 개인의 서사가 쓰여진다. 드러나는 활동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심적인 영역일지라도 그 서사는 분명히 쓰여지고 있다. 공략을 모르는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는 과정을 지나게 된다. 맨땅에 헤딩이라기보다는 맨땅에 필사에 가깝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문장을 스스로 받아적어야 하니까. 그 끝에는 지혜가 있다.
문제는 방황이 방황처럼 안 생겼다는 데 있다. 영화라면 여기서 비장한 음악이라도 깔리겠지만 현실의 방황은 조용하다. 겉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출근하고, 밥 먹고, 잠들지 못할 뿐이다. 진행률 표시도 없다. 지금이 방황의 초입인지 한복판인지 끝물인지 알 수 없고, 애초에 이게 방황이 맞긴 한지도 확신이 없다. 확신이 없다는 것 자체가 방황의 증거라는 걸 나중에야 안다. 그래서 방황 중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어떤 지도도 통하지 않는 구간을 지나는 중이니까. 다만 그 구간에서 쓰이는 문장들이 나중에 가장 비싼 문장이 된다는 것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다.
그리고 방황이 끝나면 일이 하나 남는다. 흩어진 파편들을 갈무리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인문학적 소양이 다시 요구된다. 겪은 것을 언어로 옮기려면 결국 남들이 만들어둔 그릇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의 인문학이 예습이었다면 이번의 인문학은 정리다. 같은 책인데 다른 책처럼 읽힌다. 예전에는 문장이 눈으로 들어왔다면 이제는 몸에 와서 박힌다. 저자가 무슨 각오로 이 문장을 썼는지 짐작이 가기 시작한다. 독서가 대화로 바뀌는 순간이다. 호불호를 떠나 인간의 본성에 접근했다가 돌아왔으니, 내용의 설득력을 위한 금맥은 이미 갖춰져 있는 셈이다. 남은 건 캐서 다듬는 일뿐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용기로 시작하고, 인문학으로 예습하고, 방황으로 체험하고, 지혜를 들고 돌아와, 다시 인문학으로 갈무리한다. 방황은 서사의 고장이 아니라 서사의 클라이맥스였던 것이다. 그러니 서사의 끈을 놓쳤다고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 그 구간이야말로 아무도 대신 써줄 수 없고, 어떤 AI도 생성해줄 수 없는 부분이니까. 설득력은 결국 거기서 나온다. 잘 쓰인 문장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쓰인 문장에서. 숨 참고 방황에 아모르다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