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우주복이다: 카발라적 다이어트론
몸이 영혼의 우주복이라면, 힘들어서 정신이 몸 밖으로 튕겨나가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든 지구에 붙어 있으려 한다. 그때 땅에서 나온 것, 그러니까 탄수화물이 당기는 게 아닐까. 흙에서 자란 밀과 쌀과 감자는 지구의 질량을 농축한 물질이고, 그걸 몸에 채워 넣는 건 우주복에 모래주머니를 다는 일이다. 접지(grounding)를 식품으로 하는 셈이다. 타투도 같은 원리로 읽힌다. 다이어리 꾸미듯 우주복을 꾸미는 것, 옷꾸. 마음이 이끌리는 상징을 외피에 새겨서 "이 우주복은 내 것"이라는 애착을 붙이는 작업. 정신이 몸을 떠나고 싶어할수록 몸에 이름표를 다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을 때 유독 빵과 면이 당기고, 인생의 전환점마다 타투를 새기고 싶어지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둘 다 "나 여기 있을 거야"라는 선언이고, 방식이 내장이냐 외피냐의 차이일 뿐이다.
기독교 주기도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처음엔 이게 카발라의 영향인가 했는데, 순서를 따져보면 그렇게 말하긴 어렵다. 주기도문은 1세기, 카발라가 체계를 갖춘 건 중세니까 천 년 이상 차이가 난다. 정확히는 영향 관계가 아니라 수렴이다. 헤르메스주의의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가 현실태로 이행한다는 구도, 카발라의 유출론. 서로 다른 전통이 같은 직관을 각자의 언어로 발명한 것이고, 주기도문의 저 구절은 그 직관의 히브리적 버전이라 보는 게 맞겠다.
아무튼 카발라의 지도를 빌리면 이렇다. 생명나무 꼭대기의 케테르는 뜻, 그러니까 아이디어이자 청사진이자 이데아다. 하늘의 형이상학적 세계에서는 이미 완료형이다. 문제는 그게 맨 아래 말쿠트, 즉 인간계에는 아직 안 내려왔다는 것. 인간의 일이란 신의 뜻을 수신해서 지구에 테라포밍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큰 흐름은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고 봐도 되고, 관건은 관제탑 신호를 얼마나 양호하게 수신하느냐다. 여기서 페르세포네가 교훈이 된다. 지하에서 석류 몇 알을 먹었다는 이유로 일 년의 일부를 지하에 귀속당한 여신. 지하의 것을 우주복에 채워 넣으면 지하에 묶인다. 수신 감도를 유지하려면 적당한 수준의 무게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일이라는 게 애매하다. 일은 분명 하늘의 것을 땅에 옮기는 행위인데, 정작 현장에서 듣는 건 신의 말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다. 그러다 보면 내 안의 신성이 중간 결재라인 다 건너뛰고 케테르에 직통으로 연결되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온다. 그때 찾는 게 술과 담배다. 이것들은 지상의 것을 증류하고 태워서 만든 액기스라, 역설적으로 나를 말쿠트에 계속 붙잡아둔다. 초월 욕구를 지상의 농축물로 달래는 것이다. 하늘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해질수록 더 무거운 닻을 찾는, 이상하지만 이해되는 역학이다. 게다가 몸의 질량이 커지면 중력도 커져서, 조금만 움직여도 쉬어야 하고, 조금만 해도 열심히 한 느낌이 든다. 고행의 보상을 헐값에 얻는 구조다.
문제는 5축에서 드러난다. 공간 3축에 시간축을 더하고, 그 시간에 몰입도라는 축을 하나 더 얹으면, 삶의 부피는 "얼마나 살았나"가 아니라 "그 시간의 밀도가 얼마나 높았나"로 계산된다. 시간의 밀도는 경험과 몰입이 결정하는데, 우주복이 무거우면 몰입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몸의 밀도를 높일수록 시간의 밀도는 낮아지는, 두 밀도의 반비례 관계. 같은 십 년을 살아도 무거운 우주복으로 산 십 년과 가벼운 우주복으로 산 십 년은 5축 부피가 다르다. 다이어트가 미용 문제가 아니라 시공간 문제가 되는 지점이다.
혼은 이 우주복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연식이 오래되어 기능이 떨어지기 전에 알아봐야 한다. 고강도 출력이 필요한 국면인지, 장기 순항 모드인지, 수신 감도를 최대로 올려야 하는 시기인지에 따라 필요한 무게와 연료가 다를 테니까. 그러려면 이것저것 다 몰아보고 상황에 맞는 설정값을 찾는 게 중요하다. 설명서가 없는 장비는 결국 시행착오로 배우는 수밖에 없다. 라고 하면서, 다이어트 의지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다시 한번 구체화해본다.
아, 하나 더. 카발라에서는 케테르 위에도 세 겹의 장막이 있다. 아인(無), 아인 소프(無限), 아인 소프 아우르(無限光). 존재 이전의 부정의 영역이라, 불교의 공(空)에 상응하는 자리로 자주 비교된다. 그러니까 무게 조절에는 하한선도 있다. 질량이 너무 낮으면 우주복째로 공의 세계로 이탈해버릴 수 있다. 극단적 금욕이 위험한 이유다. 결국 목표는 두 방향의 왕복이다. 말쿠트에서 케테르로 올라가는 것, 그리고 공의 가장자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둘 다 해봄직하다. 다만 왕복표의 전제 조건이 하나 있는데, 우주복이 왕복을 견딜 만큼 가볍고 튼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샐러드다.